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멜리에스필름 Jun 08. 2019

기생충 - 리뷰 & 해석

 안녕하세요. 오늘 이야기할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만 글을 읽어주세요. 


봉준호 감독의 영화

 어떤 관객들에게 영화는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움을 얻는 오락일 수도 있고, 어떤 관객들에게는 삶을 환기시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어떤 관객들에게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관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선택해서 자신의 취향이 아닌 영화는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이 모든 관객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라는 점입니다. 저는 이 모든 관객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은 한국 최초로 가장 큰 권위를 자랑하는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보다도 뛰어난 성취라고 생각합니다. 기생충은 블랙코미디와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비판적인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아낸 영화입니다. 소리 내어 즐겁게 웃다가 영화가 끝날 때즘에는 쓴웃음 지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영화 이야기로 넘어가 전에 이해를 돕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불평등한 신분사회였던 귀족사회는 시민혁명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제 모두 자유를 가지게 될 거라는 희망을 품었던 것도 잠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들은 새로운 계급을 형성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자본가들의 자본을 보전하는 방식으로 급속도로 발전합니다. 현시대에 일계 시민이 자본가들에게 도전하거나 계급을 역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돼버렸습니다. 과거 신분주의 사회에서는 불합리함에 대한 분노와 혁명이 가능했다면, 지금의 자본주의는 미디어를 통해 노력하면, 누구나 성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달콤한 거짓말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자신들의 위치를 넘보지 않도록 공고히 합니다. 권력과 공포보다도 무서운 것은 달콤한 허상인 꿈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꿈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죠. 또한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누군가 부를 가지게 되면, 반대로 누군가는 반드시 빚지는 자들이 생기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부를 쌓을 때마다, 누군가는 점점 가난의 굴레에 허덕이게 되는 것이죠. 


자 그럼 본격적으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등장인물과 그들이 속한 계급에 대한 설명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계급의 꼭 대기에 위치하는 박사장.

 박사장은 자본 계급의 꼭대기인 고용주의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박사장은 쿨하고 젠틀한 겉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기택에게서 나는 냄새를 혐오하고, 기택이 자신의 사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선을 넘는 것을 싫어한다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이 상대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냉철하고, 이기적인 자본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선균배우가 맡았는데요. 박 사장이라는 인물을 가감 없이 훌륭하게 표현해 냈습니다.

중간 계급인 노동자에 속하는 기택의 가족.

 기택의 가족은 백수 신분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하의 계층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박사장에 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직업을 얻어 돈을 벌게 되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되죠. 박사장 가족이 여행을 떠난 집에서 주인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이들에게도 언젠가 그런 집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혹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헛된 희망을 가지게 됩니다. 

계급의 최하층에 속하는 지하생활자.

 이들은 피라미드에 가장 밑바닥을 차지하는 빚진 자들입니다. 이들은 절박한 상황에 처하다 보니 고용주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입니다. 지하방에 주인과 대통령 사진을 걸어 놓고 충성을 외치는 그를 보면, 왜 일부 극빈층들이 극우 정당에 투표를 하고 자본가들을 지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권력에 대한 충성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그 선망함으로써 자신과 동일시하며 우월감을 갖습니다. 기택의 가족은 이들과 갈등을 겪고 싸웁니다. 하지만 피라미드의 최상단에 있는 계급과 밑바닥에 있는 이들은 서로 공생하는 관계이죠. 

지하생활자와 기택의 가족의 싸움

 지하생활자들은 기택의 가족과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자신들이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존과 결부된 문제입니다. 기택의 가족은 지금 박사장의 집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만약 일자리를 잃게 되면, 또다시 돈을 벌 수 없는 신분이 되어 밑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지하생활자와 경쟁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직업을 가지게 되었는데, 또다시 직업을 잃고 백수 신세가 된다는 건 기택의 가족에게는 공포가 될 수 있습니다.


박사장과 기택의 싸움

 지하생활자와 기택의 가족의 싸움의 과정 속에서 기택의 가족은 지하 생활자의 부인을 죽이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하생활자의 공격으로 기택의 딸이 칼에 찔리게 됩니다. 칼에 맞아 피 흘려 죽어가는 딸을 보고도, 쓰러진 자신의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차 키를 넘겨줄 것을 권유하는 박사장의 모습을 보고 기택은 분노합니다. 결국 기택은 박사장을 죽이고 말죠. 어차피 모든 것을 잃어버린 기택이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박사장을 죽임으로써 현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 없지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복수이자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거부와 복수로서의 퇴행

 박사장을 살해한 기택은 지하로 들어갑니다. 결국 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택의 선택은 결국 성장이 아닌 퇴행입니다. 자본주의는 사회를 발전시키고, 성숙시켰다 말하고 있지만, 사실 권력과 자본을 지키는데 집중함으로써 사실상 발전이 아닌 퇴행의 길을 택한 것이죠.


 기택의 퇴행은 지하 생활자의 것과는 다릅니다. 지하생활자는 생존에 대한 공포로 박사장에 굴복한 존재였다면, 기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기택이 지하생활을 택하는 것은, 회피가 아닌 일종의 사회에 대한 반항과 거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택이 인간으로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날 체육관에서 잠들 때, 기우에게 기택이 했던 말처럼 희망과 계획은 갖는다는 것은 어차피 이뤄질 수 없기에 부질없는 일이었습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기우는 아버지가 지하에 있다는 것 을 알게 되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포부를 밝힙니다. 하지만 그 포부라는 것은 돈을 많이 벌어서 집을 사겠다는 허황된 계획일 뿐입니다. 머리를 다쳐서 정신이 온전치 못한 기우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저택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행복했던 순간은 백수로 지내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부족하긴 했지만, 화목한 가족이었고, 자신들만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갔으니까요. 하지만 박사장의 집에 들어가게 되면서, 돈을 벌고 직업을 가지기 위해 자신들의 모습을 바꾸고, 도덕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서, 결국 그 선택의 결과로 파멸을 하게 되니까요. 


 돈을 벌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 사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기생충이라고 말합니다. 노력 없이 남에게 기대려 하는 사람들을 좋아할 사람은 없겠죠. 하지만, 노력해도 변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정당한 대가를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무엇이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을까요. 기택의 가족은 사실 부정한 방법으로 박사장의 집에 들어갔지만, 유능하게 자신들이 맡은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정당한 대가가 주어지는 일이 있었다면, 그들은 노력하고 제대로 소임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겁니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퇴행뿐입니다. 열심히 헤엄을 치지만, 결국 제자리 헤엄을 치고 있을 뿐이라는 씁쓸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 영화였습니다. 


 기생충은 남들에게 비난받는 존재로서 의미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불공정한 사회에서 택할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저항으로서의 기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마음이 좋질 않았습니다. 괴물이나, 설국열차에서는 사회에 대한 날 선 비판이 있을지언정,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했었는데, 이 영화는 그런 희망이 담겨 있질 않으니까요. 하지만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다음은 제 유튜브 채널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들러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