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시커멓게 물들여 세상을 투명하게 되찾는 태도
책상 서랍 깊숙한 곳이나 안경집의 어두운 내벽에 몸을 붙이고 안경 닦이 천 한 조각이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이 부드럽고 얇은 무명의 존재는, 주인이 세상의 얼룩에 시야를 가로막혀 막막한 눈짓을 보낼 때에야 비로소 비단결 같은 손길을 내민다.
손바닥에 닿는 이 가벼운 질감 속에는, 자신의 몸을 닳게 해서라도 타인의 앞날을 환하게 열어주려는 지극한 배려가 촘촘히 짜여 있다.
이 작은 천의 유일한 업은 타인의 시야를 어지럽히는 뿌연 침전물들을 자신의 섬유 조직 안으로 남김없이 품어 안는 일이다.
누군가의 지문이 남긴 번들거림과 바람에 실려 온 고단한 먼지들이 투명한 유리알을 덮칠 때마다, 안경 닦이는 거침없이 그 혼탁함의 한복판을 매끄럽게 훑어낸다.
천이 렌즈 위를 지날수록 세상의 경계는 비로소 제 빛깔을 찾으며 선명해지지만, 그 대가로 천의 결 사이사이에는 닦아낸 만큼의 고독한 어둠이 증발하지 못한 채 쌓여간다.
세상을 맑게 보여준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순결한 빛깔을 잃어가는 과정이다.
상대의 눈앞을 선명하게 만들기 위해 정작 자신은 시커멓게 물들어가는 그 조용한 소외.
우리는 안경을 닦은 뒤 눈앞에 펼쳐진 광명에만 감탄할 뿐, 그 오물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다시 어두운 구석으로 돌아가는 천의 노역에는 무심하다.
진정한 조력자는 자신이 닦아낸 투명함에 이름을 남기려 하지 않는다.
그저 타인이 다시 세상을 오해 없이 바라보게 되었다면, 가장 낮은 곳으로 자신의 몸을 숨길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누구나 맑은 시야를 가졌노라 자부하지만, 사실은 누군가가 우리의 편견과 흐릿한 안목을 말없이 문질러주었기에 가능한 일임을 잊고 산다.
나의 시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는 그 오만함 뒤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의 흐릿한 시선과 비겁함을 부드럽게 삼켜준 수많은 조력자가 존재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이 세상의 본질을 조금이라도 더 다정하게 바라보게 돕는 일, 그것이야말로 이 메마른 시대에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장 거룩한 연대다.
마찰은 예외 없이 마모를 동반한다.
수천 번 렌즈를 문지르며 부드러웠던 섬유의 끝은 조금씩 거칠게 마르고, 타인의 허물을 받아내는 인내의 용량은 한계에 다다르며, 천은 본래의 선명함을 잃고 어느덧 지저분해진 몰골로 남는다.
더 이상 남의 얼룩을 흡수할 수 없을 만큼 지쳐버린 천은 결국 새로운 존재에게 자리를 넘겨준다.
그 소멸의 끝에서 천은 슬퍼하지 않는다.
주인이 다시 세상을 마주할 때 어떤 거리낌도 느끼지 못했다면, 자신의 존재 이유는 그 투명한 창 너머에서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손때 묻어 뻣뻣해진 천 조각을 가만히 펼쳐 본다.
거뭇하게 변해버린 섬유의 올마다 내가 차마 직시하지 못했던 세상의 고단함과 나의 게으름이 묻어 있다.
나는 이 지저분한 조각 덕분에 오늘도 타인의 진심을 곡해하지 않고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빛을 포기하는 존재, 그가 남긴 맑은 시야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증오하지 않게 하는 가장 소리 없는 응원이다.
먼지와 오물을 고스란히 제 몸으로 받아내며 흐려진 저 천 조각이야말로, 세상이 잃어버린 맑은 시야를 되찾아주기 위해 스스로 어둠을 껴안은 이름 없는 수호자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