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라는 거대한 사육장과 사료를 탐하는 인간의 굴레

깨어 있는 자의 처절한 발버둥과 스스로를 가둔 무지한 자들의 안락한 미련

by 풍운

우리는 스스로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우리 안에 갇힌 존재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매스컴이 흘려보내는 정보를 진실이라 믿으며 주는 대로 받아먹는 민중은 자신이 사육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화면 속 세상이 설계한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한 채, 입안으로 던져지는 것이 보약인지 독약인지도 모른 채 묵묵히 씹어 삼킨다. 그 무지함은 때로 안락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실상은 자아를 거세당한 채 시스템이 요구하는 비계만을 찌우는 가련한 가축의 삶과 다를 바 없지 않았을까 싶다.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그 미련함은 사육장을 유지하는 가장 강력한 벽이 된다.

반면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이들은 이 우리 안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자들이다. 그들은 매스컴의 선동을 거부하고 시스템의 이면을 보려 애쓰지만, 결국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감옥이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깨어 있다는 감각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어, 자신이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목격하게 만드는 저주가 된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통장 잔고와 숫자로 환산되는 가치 체계에서 벗어낼 수 없는 현실은, 신념을 가진 자마저도 비참한 쓴맛을 보게 만드는 장치로 작동한다. 자각하지 못하는 이들의 평화로운 식사를 지켜보며 느끼는 자괴감은 깨어 있는 자가 지불해야 하는 가혹한 비용이다.

사육장은 묵묵히 받아먹는 이들에게는 천국이요, 나가는 문을 찾는 이들에게는 지옥이다. 민중은 자기가 먹고 있는 것이 영혼을 좀먹는 줄도 모른 채 더 화려하고 달콤한 독을 갈구한다. 그들은 비판적 사고를 피곤한 일로 치부하며, 시스템이 정해준 유행과 가치관을 따르는 것으로 소속감을 느낀다. 자각 없는 미련함은 그들에게 공포를 지워주는 대신 노예의 삶을 선물한다. 반면 발버둥 치는 자들은 그 무지한 평화를 경멸하면서도, 정작 자신 역시 생존을 위해 그들과 같은 사료를 나누어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 이 우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사육되는 사실을 아는 자와 끝내 모르는 자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본이라는 거대한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광대들일 수 있다. 신념을 외치는 목소리조차 때로는 시스템에 의해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고, 거친 몸부림마저도 구경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이 사육장의 생리다. 보약인 줄 알고 들이켰던 성공의 달콤함이 사실은 영혼을 마비시키는 독약이었음을 깨달을 때쯤, 우리는 이미 너무 비대해져 우리 문을 나설 힘조차 잃어버린 상태가 된다. 발버둥 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 보일 만큼 자본의 중력은 거대하고, 그 안에서 자각 없이 머무는 미련함은 지독하게 견고하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가 무엇을 삼키고 있는지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내가 쫓고 있는 가치가 매스컴이 주입한 가공된 욕망인지, 아니면 내 영혼이 갈구하는 진실한 갈증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지한 안락함에 취해 서서히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피를 흘리며 우리 벽을 긁어서라도 자아의 흔적을 남길 것인가. 자본주의라는 우리는 오늘도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그 어떤 선택도 우리 밖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서글픈 진실만을 남긴다. 자각하지 못하는 대중의 평화로운 저녁 식사 아래서, 누군가의 신념은 그렇게 소리 없이 으스러진다.


사료를 주는 손을 신이라 믿는 미련한 군상들 틈에서, 벽을 긁어대는 비명 섞인 몸짓은 자본주의의 횡포도 차마 무너뜨리지 못하는 자의 처절한 발악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