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미 153, 투명한 껍데기만 남기고 떠나는 소멸의 미학
책상 서랍 구석이나 필통 속에서 가장 흔하게 굴러다니는 물건을 꼽으라면 단연 하얀 몸체의 모나미 볼펜일 것이다.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모르고, 잉크가 조금만 끊겨도 미련 없이 버려지는 이 작은 도구는 사실 우리 삶에서 가장 정직한 소모를 실천하는 존재다.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가득 차 있던 검은 잉크가 한 줄 한 줄 글자가 되어 종이 위로 옮겨질 때마다, 볼펜의 생명은 조금씩 줄어든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이 하얀 대롱은 자신의 몸속에 담긴 검은 피를 남김없이 쏟아내어 타인의 사유와 기억을 형상화하는 일에 전 생애를 건다.
볼펜에게 쓰는 행위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조금씩 깎아내어 타인에게 '기록'이라는 유산을 남기는 숭고한 소멸의 과정이다.
잉크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지만, 볼펜은 단 한 번도 펜촉을 멈추거나 자신의 소모를 아까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언가를 '다 썼다'고 말하며 빈 볼펜을 쓰레기통으로 던지지만, 그 빈 대롱은 사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온전히 소진해냈다는 가장 고요한 증명이다.
잉크가 줄어들수록 볼펜의 몸체는 점점 투명해지고,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까지 종이 위에 문장으로 박제되었을 때 볼펜은 비로소 무거운 잉크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자기 몸을 헐어 타인의 생각을 빛나게 해주는 이 소박한 도구는, 진정한 가치란 움켜쥐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꺼이 비워내는 데 있음을 묵묵히 보여준다.
화려한 만년필처럼 금빛 펜촉을 뽐내지 않아도, 모나미 볼펜은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성실하게 자신의 종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간다.
문득 나의 삶을 이 텅 빈 볼펜 대롱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얼마나 '보존'이라는 허구의 강박에 갇혀 사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늘 나를 채우는 데 급급하며, 내 안의 에너지가 고갈될까 봐, 내 소중한 것들이 닳아 없어질까 봐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남에게 내어주기보다 내 창고를 채우는 것이 성공이라 믿고, 소모되는 것을 패배라 여기며 잉크가 가득 찬 채 굳어버린 불량 볼펜처럼 무의미하게 나이만 먹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짜 비극은 잉크를 다 써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 한 줄의 진실한 문장도 남기지 못한 채 잉크가 안에서 차갑게 말라붙어 버리는 고독한 정지 상태다.
볼펜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잉크가 들어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잉크가 종이 위로 흘러나와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는 '흔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존재 자체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재능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누군가에게 기꺼이 소진했을 때 비로소 삶의 밀도가 선명해진다.
텅 빈 볼펜 껍데기를 보며 느끼는 묘한 경외감은, 자기 목적을 완수한 존재가 뿜어내는 거룩한 고요함에 가깝다.
비워진 만큼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비워졌기에 비로소 가벼워지고 완성되는 삶의 역설을 우리는 이 흔한 볼펜 한 자루에서 다시 배워야 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이 소유하고 더 오래 보존하라고 유혹하며 우리를 탐욕의 굴레에 가두지만, 시간이라는 종이 위에 우리가 남길 수 있는 것은 결국 내가 소진한 흔적들뿐이다.
오늘 내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혹은 내가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가 내 영혼의 잉크를 조금 닳게 했을지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 소모된 양만큼 누군가의 삶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혔다면, 그것으로 나의 하루는 이미 충분히 완성된 셈이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매끄럽게 보존된 삶보다는, 비록 만신창이가 되어 버려질지언정 마지막 한 방울까지 뜨겁게 쥐어짜 낸 기록이 있는 삶이 훨씬 아름답다.
필통 속에 굴러다니는 모나미 볼펜을 다시 한번 가만히 쥐어본다.
아직 절반쯤 남은 잉크는 나에게 조용히 속삭인다. 남은 생을 그저 안전하게 고여만 있게 할 것인지, 아니면 누구보다 치열하게 흘려보내며 세상에 나만의 문장을 새길 것인지 말이다.
가장 흔한 도구가 전하는 가장 귀한 가르침은, 결국 산다는 것은 나를 조금씩 헐어 타인에게 닿는 '사랑의 소모'라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다시 펜촉을 종이 위에 올린다. 내 안의 검은 피가 다 마르는 그날, 내가 남긴 문장들이 누군가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정성껏 나를 비워낸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인생이라는 페이지 위에 각자의 잉크를 쏟아붓고 있는 작가들이다.
내가 가진 것이 줄어든다고 두려워하기보다, 내 소멸이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
볼펜의 하얀 대롱이 투명해질 때 비로소 그 속이 맑게 들여다보이듯, 우리 역시 모든 욕망을 소진한 뒤에야 비로소 가장 순수한 본연의 나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잉크가 멈추는 그 순간까지 멈추지 않고 선을 그어 나가는 저 무뚝뚝한 볼펜의 뒷모습에서, 나는 오늘 생의 가장 뜨거운 열정을 배운다.
삶의 완성은 잉크를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직하게 소진하여 투명한 빈 대롱으로 남는 일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