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은 진짜 살았다.
지난겨울, 충동과 회오리치는 복잡한 마음으로 5년 전 헤어진 첫사랑에게 연락했다. 첫사랑의 목소리는 들뜨고 밝았다. 나는 ‘오빠의 바뀐 연락처를 계속 메모장에 간직하다가 결국 이렇게 연락했어. 나는 연락처가 그대로인데 오빠는 나한테 연락 한 번 안 한 독한 사람이야.’라고 말했다. 첫사랑은 계속 환한 태도로 연락해준 것을 고마워했다. 그는 웃고, 나는 감정이 벅차 계속 울었다.
우리는 약속을 잡아 만났다. 시끄러운 커피숍에서 우리는 오랜 친구를 만난 사람처럼 금세 어색함을 물리고 편안한 대화를 이어갔다, 첫사랑은 커피를 음미하며 혼자서 커피를 즐기곤 한다고, 자기는 작은 개인 커피숍이 좋아 자주 이용한다고 말했다. 내가 알던 모습이 아니라서 조금 낯설었다. 그때와 많이 달라졌구나, 싶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다른 여인과 사랑도 했었다고 고백했다. 낯설고 허무하고 한편으론 안심되는 복잡한 심정이 느껴졌다. 사실 첫사랑도 나처럼 아무도 사랑하지 못하고 지낼 거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지냈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살면서 잠자는 시간 동안 꿈속에서 환상과 연애했던 나처럼 첫사랑도 다른 사랑을 못 하고 나를 품고 지낼 거라고 멍청한 망상을 했다.
나의 첫사랑은 그 사람이지만, 그의 첫사랑은 내가 아니다. 학창시절, 그의 첫여인을 본 적 있는데 투명할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생기발랄 에너지가 넘치는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사람이 사랑할만한 여자 같았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 들려온 비보는 그 첫여인은 다른 남자와 만나서 아이를 가졌지만, 남자에게 버려지고 결국, 출산 후 우울증에 벗어나지 못해 핏덩이를 두고 자살했다.
그리고 나와 헤어진 후 만난 여인은 그가 자살에 실패하고 누워있는 신세에서 만났다고 한다. 그 여인이 그를 다시 살리고 회복시켰다.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데 질투가 났다. 그가 사랑했던 두 여인은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그에게 각인될 수밖에 없는 존재일 거라는 유치한 질투가 났다.
무엇보다 나는 새로운 사랑을 할 수 없었는데, 그는 사랑했다는 게 억울하고 한편으로 감사했다. ‘역시 내가 어리석었구나.’ 그동안 첫사랑의 본질을 사랑한 게 아니라, 죄책감 속에 환상을 만들어 사랑했던 내가 어리석고, 씁쓸했다.
당신 덕분에 사랑을 알았어요.”
다른 여인과 사랑한 걸 알고서 복잡한 시간에 걸쳐 결국, 나는 그의 환상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래도 마흔이 되고, 아흔이 되도 그를 잊지 못할 거다. 사랑의 실타래를 간직할 거다. 그러나 환상을 놓으면서 그이와 밤마다 꿈속에서 연애하지 않을 거고, 다른 진짜 사랑을 할 거다. 첫사랑은 나에게 사랑을 알게 해줬고, 또 다른 사랑을 할 수 있게 했다.
사랑하고 싶어서 첫사랑을 놓았다. 더는 그가 꿈에 나타나지 않는다. 평생 환상과 연애하지 않고 다른 사랑을 할 수 있다. 생애 사랑은 단 하나라고 단념했던 나는 이제 사랑을 깨닫는다.
죽지 않아서 고마워요. 내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여자로 깨닫게 해줘서 고마워요.”
사실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장례식을 자주 상상했다. 그는 죽음에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살시도 했던 건 놀랍지도 않았다. 그가 산 건 당연히 감사한 일이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떠나 나에겐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내가 어리석은 환상에서 깨어난 거다. 아마 그가 죽었다면 평생 죄책감이 만든 환상과 연애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살아서 나도 생생하게 사는 거다.
지난 나날, 다른 남자들을 만나면서 감정을 최소로 아끼고 벽을 치고 만남의 한계를 명확하게 그었던 나는 없다. ‘난 당신을 아끼고 좋아하지만 사랑 따윈 절대 안 해요’라고 상대에게 상처 주는 일도 없다.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서 사랑할 거다.
첫사랑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서 다른 사랑을 깨닫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