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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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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우투리브 Mar 22. 2023

삽겹살 회식

공장 뒷담화

내일 모레 글로벌 비지터 방문이 있어 이번 주는 그 미팅 준비로 우리는 모두 분주하다. 발표 슬라이드를 수정해서 팀장에게 보내고 퇴근하려 하는데 팀즈 챗이 뜬다. “언제 끝나세요? 당연히 할 건 많으시겠지만... 끝나고 XX네서 삼겹살 드시고 가실래요?" 동료직원이 묻는다. 오늘 남편도 늦게 온다고 한 날이라 이모님께 전화 드리고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이 업계에서 10년 넘게 일 한 내가 봐도 이 곳 마케팅은 일이 정말 많다. 같이 삼겹을 먹고 있는 이 동료들도 혼자서 거의 두 사람분의 일을 해내고 있는 것 같다. 평소 때는 전혀 불만을 드러내지 않아 알 수가 없었는데 회사에 대한 이들의 냉소와 불만은 서슬 퍼렇다.​


" 갑자기 글로벌 비지터 발표 시키는 것도 짜증나고, 슬라이드도 자꾸 바뀌는 것도 짜증나요."

" 자기네들한테나 이 발표가 중요하지, 나한테는 하나도 안중요해. 주니어인 내가 발표를 하는데 나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어요? 내가 그냥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영어로 쏼라쏼라 해주면 된거잖아."​


" 나를 코리아 탤런트로 돋보일 수 있는 자리로 생각하고 준비하라는데 겨우 15분해서 내가 무슨 하이라이트가 되겠어요."

" 내가 발표 망치면 준비할 시간 짧게 준 그들 탓이지. 엄청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면 처음부터 시니어를 뽑았어야지, 나를 뽑았잖아요. 싼돈 주고 부려먹으려고~“ ​


" 발표할 때 질문 나오면 그냥 챗 봇처럼 똑같은 말만 해야지. 무슨 질문을 하든 AI 처럼 똑같은 말만"

앞에서 듣고만 있던 다른 직원은 조용히 이렇게 말한다.​

" 저는 그냥 직장 생활 자체를 2년 정도만 더 하고 그만 두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딜가나 똑같을 것 같아서요“


" 이렇게 열심히 살아서 사장님되면 뭐해요? 사장님 되면 얼마 받아요? 한 2억 받나? 그럼 세금 구간 늘어나서 실수령액은 얼마 되지도 않아요. 그걸로 부자 될 수 있겠어요? 직장인은 리스크를 감당하지 않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해선 돈을 벌 수 없어요. "

“ 어느 순간부터는 아이디어 내는 것도 싫고, 아이디어 내면 나보고 하라고 하니깐. 더 궁금해 하는 것도 싫고. 그럼 일만 많아지니깐. 나는 이 회사에서 하는 모든 프로젝트가 제발 모두 실패하길 진심으로 기도해요. ”

실제로는 이런 내색없이 굉장히 열정적으로 일하고 잘하는 친구들인데 속 마음은 저렇다는 것이 반전 사이코패스 드라마같다. 연일 계속 되는 강도 높은 업무에 실무자들은 지쳐간다. 분명 이 회사에 처음 이직했을 때만 해도 나처럼 핑크빛 목표가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냥 회사 ‘밖에’ 있는 것만 해도 행복하다고 얘기한다. 제품의 중심인 마케팅이니 부서의 특성상 워크로드가 많을수 밖에 없고 스트레스가 늘 있을 수 밖에는 없다. 이렇게 부서 탓, 그리고 노동을 착취하는 구조로 돌아가는 미국회사 탓으로 돌려도 이건 해도 해도 너무 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의 문화는 네가 만들어가는 거야. 불합리한 부분은 고치고 더 좋은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너는 어떤 노력을 해봤니?


미안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안했다. 비겁하고 찌질해보이지만 나는 그냥 빠른 손절을 택했다. 내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데 내가 무슨 자선 사업가라고 그런 오지랖을 떠냐. 그건 정말 여유있고 회사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거다. 똥이라고 생각하면 얼른 피하는게 맞는거다.

​ㅋ


어떤 이는 인생을 살면서 최소한 내 자신만이라도 기쁘게 하며 살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누가 날 욕할까 싫어할까 눈치만 보며 남의 기준에 맞춰서 살던 인생이었다. 최소한 나 한명이라도 기쁘게 해주자. 그래서 나는 비록 비염으로 코 질질 흘리며 내일 미팅 준비도 덜 되어 있었지만 동료들과 삼겹살에 진로 두병을 비우고 퇴근했다.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과 내가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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