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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쓰 Apr 03. 2020

닭다리 두 개를 먹어서는 안 돼

그것이 삶의 지혜

치킨 중 닭다리가 맛있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아들 녀석은 네 살 무렵 치킨을 처음 먹을 때부터 닭다리를 좋아했다. 혹시 이 녀석이 닭가슴살을 좋아한다면 닭다리는 평생 나와 와이프 차지가 되겠구나 상상해 본 적이 있다. 그런 행복 회로를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닭가슴살의 살코기가 단백질의 보고라는 논리로 아들 녀석의 입에 스리슬쩍 넣어본 것도 솔직히 닭다리를 차지하고 싶은 나의 욕망에 조금은 기인했다. 역시 내 기대를 저버린 아들 녀석은 닭가슴살을 뱉어내고 닭다리를 뜯었다.


그때부터 닭다리 두 개는 전부 아들 녀석 차지였다. 닭다리를 두 개를 먹는다는 것은 한국의 사회 구조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닭다리는 항상 하나를 먹는다면 본전이요. 운이 없다면 못 먹을 수도 있는 부위였다. 치킨 한 마리를 꼭 둘이 먹으란 법은 없지 않은가. 혹은 앞으로 인생에서 수없이 만나게 될 선배님들, 직장상사, 친척 어르신, 장인어른, 장모님, 잘 보여야 할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꼭 닭다리 하나가 나의 몫으로 떨어지리란 보장은 없다.


나는 아빠로서 그런 사회의 쓴맛을 가르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고작 치킨 한 마리 먹는데 거창한 사회구조의 논리까지 파악할 필요는 없지만, 언젠가는 아들 녀석도 깨우쳐야만 하는 일이며, 누구나 거쳐가야 할 통과의례이다. 이 시기를 잘 극복하면 목뼈와 퍽퍽살을 먹어도 자아실현이 가능하다.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닭다리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중에 닭다리 두 개를 모두 차지하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을 미리미리 알려줘야 했고, 그것은 정말 중요한 치킨 예절이라는 게 나의 지론이었다.


알찬 부위는 다 아들에게 주고난 뒤 남은 목뼈를 뜯으며 와이프에게 이러한 얘기를 일장 연설했다. 닭다리 두 개 다 주지 말라고, 하나는 내가 먹어야 한다고, 나중에 하나 뺏기면 울고불고 난리 나니 지금부터 교육해야 한다고. 하지만 가정교육에서 풍족함과 넉넉함을 담당하고 있는 와이프의 한마디에 나의 치킨 교육론은 격파되었다.



'애들 먹게 그냥 둬-'



와이프에게 우선순위는 그런 사회의 생리를 깨우치는 것보다 아무거나 맛있게 많이 먹는 것이 더 우선순위였다. 아들 녀석이 엄마가 기껏 차려놓은 유기농 밥상을 앞에 두고 한 숟갈 떠먹고 식음을 전폐할 때의 분노를 익히 알기 때문에 뭐라고 더 할 말은 없었다. 치킨도 사실 밥을 너무 먹지 않아 뭐라도 많이 먹여야 할 것 같은 마음 반, 밥하기 싫은 와이프 마음 반, 일 때 주로 시켜먹지만, 비싼 소고기도 잘 안 먹는 녀석이라 이렇게 뭐든 고기라도 먹어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 게 부모 마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치킨 교육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돌이 막 지나 아직 튀긴 음식을 주지 않는 둘째 아들 녀석이 우리가 먹는 치킨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면, 시간이 지나 둘째 녀석도 치킨을 먹게 될 때 첫째 아들 녀석과 닭다리 쟁탈전이 벌어질 것만 같다. 그러면 닭다리는 자연스레 하나씩 차지하게 될 것이며 그때 되면 자연스레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되겠지. 나의 치킨 교육은 아직 시기를 못 만났을 뿐이다. 일단 그때까지는 아무거나 잘 먹고 무럭무럭 자라줬으면 한다.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어렸을 때 치킨이 오면 형과 닭다리를 하나씩 잡고 먹었었다. 물론 나의 엄마, 아빠가 닭다리를 먹는 모습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들 녀석이 치킨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깨닫는 것처럼, 나도 치킨을 통해 좋은 것은 아들 주고 싶은 부모의 이치를 조금이나마 깨닫고 있다.


오늘은 왠지 치킨에 맥주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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