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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쓰 Apr 25. 2020

나도 모르게 육아를 시작당했다

사랑은 능동태 생존은 수동태

내 스스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고상한 맛이 있다. 그 정도 사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익히 알고 있었다. TV에서, 책에서, 혹은 엄마의 잔소리에서 줄기차게 들어왔던 남들의 시작은 항상 진취적이고 역동적이었으며 엄마친구아들 얘기였다. 그것에 비하면 나의 시작은 항상 과자봉지 속 딱지처럼 작고 귀여웠는데 보잘것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예를 들면 학종이를 모으거나, 한메타자연습을 시작하거나 그런 것들인데, 모두 엄마가 남들에게 자랑할 수 없는 소소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정확히는 우리 부부에게도 찬란한 시작이 펼쳐졌다. 그것은 바로 육아의 세계였다. 대충은 알고 있었다. 사랑으로 잉태하여, 성모 마리아와 같은 보살핌으로 하나의 생명체를 오롯이 영적 존재로 만드는 느낌으로 말이다. 우리 부부의 사랑과 보일러 설정 온도 24도 고정으로 가득 채워진 아가의 방에서 안단테의 자장가와 느릿느릿 돌아가는 모빌의 움직임으로 이미지화되어있는 육아의 출발점 앞에, 계속된 행복만 이어지겠구나 생각했던 것이 그때의 기억이었다.

 



아가를 만나는 것은 우리의 의지였지만, 육아는 수동태로 다가왔다. 말 그대로 육아를 시작당했다. 우리의 지식과 사전 정보로 아기를 키우기보다는 아기의 욕구에 우리 부부의 행동이 맞춰졌다. 시간에 따라 성장에 맞춘 단계별 분유를 정량으로 먹여야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앵 울어재끼면 졸음에 지쳐 반달처럼 감긴 눈으로 기계처럼 분유를 촥촥 흔들어 대령한 후, 제발 한 모금만 더 잡숴주시옵소서의 느낌으로 수발을 들었다. 본능적으로 품 안에 있었던 시간이 그리운 건지 엄마만 찾는 아가의 울음에 아빠로서 서운한 날들도 많았다. 먹은 것을 게워낼 때, 말문을 오랫동안 트지 못할 때, 수수깡처럼 작은 아가의 팔목에 링거 바늘을 꽃을 때 이 상황이 맞는 건지 목놓아 울고 싶은 날들 역시도 계속되었다.


하지만 급한 것은 이 시간을 버텨내는 생존의 지속이었다. 둘에서 셋이 된 이후로 우리 가족은 무언가 목표의식을 가지고 전진하기보다 되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초죽음의 와이프는 말할 것도 없고, 도통 잠이 들지 않는 아가를 배 위에 눕혀놓고 등을 기대어 쪽잠으로 버티던 나도 마찬가지 였다. 육아의 전장에서 짙게 어둠이 깔리고 별이 반짝 뜨면, 와이프와 불 꺼진 거실에서 우리 아가 많이 컸지? 고생했어 라고 서로를 토닥이며 치킨 한 마리를 뜯는 것으로 건배를 대신했다. 별처럼 반짝이는 아들의 눈망울은 나와 와이프의 마음에 여울처럼 들어와 박혔다.




생각해보면 나의 인생은 항상 거의 수동태의 연속이었다. 시키는 공부를 하고, 해주는 밥을 먹고, 사주는 옷을 입고, 원서를 받아주는 회사에 다녔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어른 세계의 폭풍을 헤쳐갈 힘이 생겼을 때 내가 스스로 해낸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아가를 만난 것 정도였고, 그 전에는 학종이를 모으고, 한메타자를 시작했던 것 정도였다. 스스로도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지 못한 삶은 멋이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의 엄마와 아빠도 나로 인해 수동태의 삶을 살았음을. 당신들도 나로 인해 '더 편하고 멋있는 삶의 포기'를 시작해 폭풍 속 우산이 되었던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공부를 하고, 맛있는 것만 골라먹고, 나이키 옷을 입고, 돈벌이가 꽤 되는 직장에 다닐 수 있었다. 사실 능동태의 연속이었다. 누군가의 수동태는 누군가의 능동태로 환생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설킨 인생에서 그것이 어떠한들 아무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되는대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도 잘못된 것이 아니고, 홀림길을 떠돌다 길을 잃어도 토닥이며 웃을 수 있다면 어떤 시작이어도 좋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일의 시작은 언제나 좋은 결과를 목표로 한다. 나빠질 일을 기대하고 시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우리 부부의 육아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변화가 있다면 우리가 가열차게 토론하며 세웠던 세부적인 목표들은 다 흩뿌려지고, 바라는 것은 아가의 웃음과 행복만 남았다는 것이었다. 이 끝이 나지 않는 육아의 여정이 힘들지 않은 이유는 시작점부터 우리에게 떨어진 삶의 과제들을 하루에도 몇 번씩 아가의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확인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시작이란 이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좋고, 갑자기 다가와도 좋다. 몽글몽글한 토마토 같은 아가의 볼에 얼굴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쁠 때처럼. 힘겹게 재워놓은 아가를 빤히 보다가 속눈썹이 너무 귀여워 다시 깨워볼까 고민할 때처럼. 육아의 시작은 이렇게 혼란스럽지만 새녘처럼 따스하고 찬란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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