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 꽤 두꺼운 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렇게 얇은 책 안에 다 들어 가는 걸까? 책을 펼치고 한 줄 읽는 순간 아, 나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구나 이 책의 내용이. 다소 기괴한 느낌의 책이라는 기억과 그리고, 그 책을 읽었던 장소만이 줄줄이 기억났다. 홍대 앞(관념적 홍대 앞이 아닌 정말로 홍익 대학교 정문 앞) 커피빈이었지. 테라스 자리에 앉아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위해 일부러 홍대 앞 커피빈에 갔다. 커피빈에 전화를 걸어, 손님 중에 누구 계신가요? 물어보면 전화를 바꾸어주던 시절이었다. 아니 이건 어느 책에서나 읽은, 더 오래된 이야기인가. 당시 붉은 손 클럽에 푹 빠져 배수아 작가의 책을 모조리 찾아 읽던 시절이었다. 어느 책 (제목도 가물가물하다. 자동차였는데) 인가를 읽고는 회사를 그만두고 비행기 티켓을 사기도 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늘 충동적인 사람이다 나는. 아무튼 이 잡듯 뒤져 배수아 작가의 책을 모조리 읽은 후 나의 삶의 방향은 다소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배수아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지금은 검색하면 작가의 sns를 찾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고, 그럼 댓글이나 디엠으로 가볍게 감사의 의사를 건넬 수도 있겠지만 당시 내가 아무리 뒤적여보아도 찾을 수 있는 것 고작 메일 주소 정도였다. 그것도 오래전 나온 책날개에 적혀있던 천리안 주소의. 천리안, 천리안이라니? 아직 운영하고 있는 걸까?(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해도 운영은 하고 있었다.)의문이 들었지만 달리 배수아 작가님께 연결된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없었기에 천리안 주소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작가님은 그 메시지를 확인하셨을까? 아마 보지 못했을 확률이 더 높겠지만, 아무튼 그 마음은 '전하고‘ 싶었던 것이지 잘 ’전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큰 흥미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곳에 많은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녀의 책을 몽땅 읽고 나니 이제는 그녀의 신간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 나는 또 다른 작가의 책을 읽고, 무언가에 빠져들고, 영화를 보고, 끊임없이 걷고 그랬을 것이다. 몇 년인가 시간이 흘러 서점에서 그녀의 신간을 발견하였을 때 꿈이라도 깬 사람처럼 그녀를 기억해 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작은 상자 속에 갇혀 끝없는 도돌이표를 만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페이지를 넘겨도 모든 문장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도 그녀의 모든 신간이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의 글을 읽기를 포기했다. 그러다 얼마 전 그녀의 단편을 무사히 읽을 수 있었고, 거기에 힘을 얻어 다시 홀을 펼쳤을 때 그녀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었고 변한 건 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숨에 읽어 내려갔던 훌 역시 지금 나는 도돌이표를 찍고 있다. 그녀의 글을 읽기 좋은 시절이라는 게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