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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꼬맹이여행자 Nov 23. 2016

나는 감히 고졸 주제에 퇴사한다

세계일주 프롤로그_세상을 향한 발걸음

2011년 수능 준비에 열을 올리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였던 내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시간은 참 야속하게도 빠르게만 흘러간다.

나는 중학교 때 우수한 성적이었지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틀에 박힌 수능 공부만 바라보며 달린다는 것에 염증을 느껴, 평소 흥미가 있던 문화산업 분야의 특성화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상업 공부와 수능 공부를 병행하며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당시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고졸 채용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상업고등학교, 공업고등학교 등을 졸업한 뒤 어려운 가정형편을 이유로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 그런 분들이 현재 국내 대기업, 은행 등 금융권, 공기업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학벌 위주의 사회로 흘러가고, 너도나도 대학에 진학하는 현실을 조금 바꾸어보고자 과거 화려했던 고졸 신화를 다시 만들어보려 한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은 취업 지도부 선생님이셨고, 당시 석차가 높았던 학생들 부터 취업 의뢰가 배정이 되었기에 나에게 대기업, 은행권 등 수많은 채용 공고를 보여주시며 권유하셨다. 나는 진학하고 싶은 대학 및 학과가 뚜렷했기에 흔들리지 않았지만, 수능 날이 점점 다가오자 불확실한 미래가 초조해지고 대학에 가봤자 높은 취업률을 뚫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두려웠다. 


몇 번의 설득과 거절이 오고간 가운데, 전국에서 딱 5명만 뽑는다는 금융공기업의 채용 공고가 나왔다.처음에는 완강하게 거절했지만 선생님과 어머니 등 모두가 좋은 직장이라고 칭했기에, 도전해보는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입사지원을 했고, 운이 좋게도 그 5명 안에 들 수 있었다.


▲ 운동화보다 뾰족구두가 더 편했고, 청바지보다 원피스가 더 익숙했던 나인데 이제 한동안 예쁜 옷들과는 작별 인사를 해야겠지. 나의 직장인 시절 모습을 남겨두고 싶어 처음으로 찍어본 프로필 사진. 표정이 다 어색하고 뻣뻣하지만, 나에게는 일종의 기념식이었던 첫 직장생활의 내 모습 남겨놓기!


2012년 1월 2일.
그렇게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앳된 소녀는 교복을 벗고 정장을 입었다. 

이 곳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최초의 고졸 사원으로 입사가 결정되었을 때, 나라는 사람의 이야기의 마무리는 해피엔딩인 줄로만 알았다. 수능, 대학, 취업, 결혼처럼 인생이란 매 시기마다 행해야 할 정해진 관문이 있는 줄 알았고, 마치 게임 속에서 치트키를 쓰고 몇 단계 뛰어넘은 마냥 이대로만 있으면 내 인생은 쭉 탄탄대로로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그저 꾸며보고 싶어 단색 매니큐어를 발랐던 그 어느 날, 나는 '너 회사에 이러고 다니니?'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 날 자꾸만 눈물이 흘렀던 이유는 싫은 소리를 들어서가 아니라, 매니큐어를 지우는게 마치 내 청춘을 지우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였다.

앞으로의 나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명백히 구분된 삶을 살아야 하는게 느껴졌으니까.


▲ 어린 나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기에 겪지 말았으면 좋았을 경험을 했고, 몰랐으면 좋았을 감정들을 느꼈다. 내가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이 '힘들었다'라는 겨우 한 마디 말로 압축되는게 서글프기까지 하다. 내 상처가 스스로 선물하는 긴 방학을 통해 아물어지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보통의 존재가 되고 싶었다. 

너무 낮은 곳도, 너무 높은 곳도 참 힘든 자리니까 열심히만 하면 보통이라도 될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23살부터는 일을 하며 야간에 대학을 다니기 시작했는데, 대졸사원과 비교 당하며 끊임없이 부족함을 되새김질해야 했던 경험들 때문에 나도 또래 친구들과 있을 때는 우수한 편이라는 것을 회사에 보여주고 싶었다. 잠도 못 자고 그렇게 좋아하는 여행도 못 가고 쉬고 싶고 놀고 싶었지만 열심히만 하면 누군가 알아줄거라 생각했고, 그 결과 매학기 수석 전액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욕심많고 독하다는 뒷이야기가 들렸다. 나는 그저 회사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부족한 지식을 채우고 싶었을 뿐인데, 결국 나의 꼬리표는 영원히 보통이 될 수 없는 존재였다.


나는 우리 조직을 사랑했고, 이렇게 크고 좋은 직장에서 일할 수 있음에 그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졌다. 

첫 직장생활이였으며, 첫 고졸사원으로서 잘 해나가고 싶었다. 승진을 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게 아니라, 그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자기가 맡은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 눈물로 마무리를 했으며 어린 나이에 5,60대가 걸린다는 대상포진에 걸렸고, 위경련에 응급실에 실려가는 일도 허다했다. 차라리 회사 옥상에서 떨어져서 죽어버리면 그 사람들은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해할까 말하며 목놓아 우는 내게 친구는 말했다. 

그 죽을 용기로 회사를 나와서 뭐라도 해보라고,
니가 겪은 세상이 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고. 


그 때부터 오랜시간 동안 과연 좋은 회사란 무엇인지, 직업이 한 개인의 일생에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지, 나라는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사실 나는 내가 금융 산업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은 '일'이기 때문에 흥미와 적성은 '돈'이라는 문제 앞에서 사그러지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을 '일'로서 하는 것과, 정말 관심이 있어서 주체적으로 열정을 가지고 하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어차피 일은 평생할텐데, 나는 스무살부터 육십살까지 매일 쳇바퀴처럼 똑같은 인생을 살아야만 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모두 본인이 가진 기질이 다른데 남들이 보기에 좋은 회사가, 과연 나에게도 좋은 회사일까?''나는 죽기전에 뼈저리게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고졸이니까 계속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일까?'


▲ 퇴사를 한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나의 평판을 들을 수 있었는데, 그래도 나 5년간 열심히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내 칭찬을 해주시는 분들도 많더라. 환송회도 11월 한달 내내 점심이고 저녁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잡혔는데, 나를 인정해주던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이 계셨음을 마지막에라도 알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리고 부족했던 나를 아껴주셨던 분들께 언젠가 당당하게 인사드릴 수 있기를.


2016년 12월 2일. 
스무살의 앳된 소녀는 어느새 반오십을 바라보는 어엿한 숙녀로 성장했다. 

그토록 떠나고 싶었던 회사였는데, 막상 마지막이라 생각하니 이 곳에서 웃고 울었던 모든 일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간다. 퇴사를 준비하면서 참 씁쓸했던 것은, 퇴사는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는 사실이였다. 종이 한 장만 제출하면 되는 쉬운 일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때문에 그 동안 이 안에서 그렇게 고민하며 괴로워한 걸까.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힘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돈'이 필요한 사람이고 이미 자본주의 사회의 맛을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돈이 있으면 맛있는 것도 마음껏 사먹고,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는데 왜 나라고 돈이 좋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였다. 나는 그냥 돈을 버는 것이 아니였다. 그 돈을 벌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의 2분의 1이 넘는 시간을 회사에 투자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내 청춘의 가치를 돈으로 맞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남들보다 빨라도 한참 빨랐던 24살 5년차 직장인에서 24살 대학교 2학년이 된다는 것은 한순간에 늦어도 너무 늦어버린 낙오자가 되는 기분이였다. 하지만 낙오자가 되는 것보다 더 두려웠던 것은 이 곳에서 그려지는 미래의 내 모습이었다. 고졸이니까, 취업난이 극심하니까, 좋은 회사니까라는 이유만으로 버티다가 언젠가는 나갈 수 있을거라는 희망마저 사라져버린 미래의 그 시점에서 '왜 그때 인생을 바꾸지 못했을까, 왜 그때 도전하지 못했을까' 후회하는 내 모습이었다. 더 이상 고민만하다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기에, 무모하게도 내 인생을 뒤바꿀만한 큰 선택을 했다. 

그리고 이왕 남들보다 늦어버린거, 조금 더 방황해보기로 결심했다. 
가슴 속에 품고만 살았던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는 꿈, 세계일주를 떠나겠다고. 
길을 걸으며 미친듯이 웃어 재껴보기도 하고 힘껏 소리도 질러보기도 하며,
한순간 한순간 다신 오지않을 나의 오늘을 아주 격렬하게 사랑해주겠다고.

▲ 내가 퇴사를 하는 것에 대해 저마다 한 마디씩 의견을 내놓는다. 누군가는 철이 없다고 손가락질을 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도전을 응원한다며 어린게 부럽다고 말한다.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 가지 생각이 다 다르다. 어쩌면 내 인생의 도박판에 주사위를 던진 셈이니까 그 누구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건, 한 가지 인생의 길만 선택해서 걸어 온 사람들이 타인의 인생에 대해 옳다 그르다 말할 수는 없다는 거다. 세상에는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만의 길을 걷고 있고, 나의 길 역시 온전한 내가 되어 걸어보지 않는 이상 이해하지 못할테니까. 


혹자는 왜 하필 세계여행을 떠나는 것이냐고, 여행을 떠나고 돌아오면 뭔가 달라지냐고 차라리 회사가 싫으면 이직을 하라고 한심하다는 투로 손가락질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일찍 입사한 내가 성공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본인들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꼽으라면 꼭 대학생 때였다고 한다. 나도 요즘 대학생들은 스펙 쌓기에 열을 올리느라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쁘고, 그렇게 노력한 이후에도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한 번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왜 '대기업, 공무원, 공기업'만 들어가면 인생이 끝인 것처럼 목매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중소기업의 실태가 어떠냐면, 요즘의 취업난이 어떠냐면 등등 잔뜩 반발이 들어올 것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어떻게 인생을 그렇게 목표 지향적으로만 살 수 있을까?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을만큼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그 전에 한 연애들은 없었어도 상관없을 보잘 것 없는 경험이였을까? 그런 연애들을 하며 사랑에 대한 고민과 경험을 했기에 지금의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결혼이라는 결실을 이룬 것은 아닐까? 


나는 취업만 할 수 있으면 그 준비 과정에서 오는 경험들은 생략해버려도 상관 없다는 식의 사회는 잘못 된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모든 사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해서 평생 직장과 집만 오가며 살아간다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는 하늘을 찌르게 높아질까?

나는 공기업에 입사해서 보장된 내 미래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은 이 하루들이 5년을 버텨도 행복하지 않고 괴로운데..이런 나는 한국 사회에서 왜 철없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데.


결과적으로 나는 행복하지 않은 삶을, 괴로우면서도 도전하는게 무서워서 주저하는 삶을 지속하는 것은 적어도 나라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의 인생에서는 옳지 않은 짓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감히 고졸 주제에 그 좋다는 공기업을 퇴사하기로 결심했다.


여행으로 인해 무언가 특별하게 바뀔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의 내가 장영은스러워질 것은 기대한다. 스무살부터 직장인이 되어 남들과 똑같은 모습을 강요받고 매일같이 눈치만 보며 작아졌던 나를 버리고, 여행 속에서 조금 더 '장영은'다워지고 '장영은'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을거라고. 

서울의 밤 공기는 참 차갑다. 이 차가운 도시를 나는 언젠가 사랑할 수 있을까. 저 수평선 너머의 아즈라이 흩어뿌려지는 미래의 그 순간에서는 조금 더 강해진 내가 있기를.


▲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몸도 마음도 참 많이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학교는 회사와는 다르게 열심히 하면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였다. 경희대학교는 단과대학 별로 상위 5%안에 들면 우수상을 주고, 최우수상은 정경대학 전체인원 2600명 중 딱 1명에게 주어진다고 한다. 매 학기 우수상은 받았지만, 1년간의 긴 휴학을 앞둔 이 시점에서 단과대학 수석으로 최우수상을 받을 줄은 몰랐기에 눈물까지 날 뻔 했다.

상 받는 모습을 엄마한테 보내드렸더니 평소 엄격하기만 하고 칭찬을 해주시는 성격이 아닌데 , '운동화가 빛이 나네. 축하해.'라는 무심하면서도 마음이 담긴 답장을 받았다. 사실 엄마한테는 참 미안하다. 딸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모자라서, 1년 넘게 장기여행을 떠난다고 하니 보수적인 우리 엄마는 얼마나 충격이였을까. 나랑 내 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좋은 회사에 취업했을 때, 여자 혼자 애 둘을 키워야 했던 우리 엄마가 얼마나 행복했을지 그 기대를 알기에 더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30대가 되기 전까지는 이기적으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불행한 효녀보다 행복한 불효녀로, 잠시만 아주 잠시만. 대신 훗날 꼭 떳떳하게 이 날의 내 결정이 참 잘한 것이였다고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딸이 될게요. 미안하고, 사랑해요.


▲ 일을 하면서도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12개국 34개 도시를 혼자서 다녀왔으니까. 여행은 힘든 사회생활 속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엄마나 친구들이 왜 그리 여행을 다니냐고 타박했을 때, 나는 여행이 왜 좋은건지 이유를 찾으려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이유를 찾지 않기로 했다. 나는 그냥 여행이 좋다. 여기에는 남에게 내보이기 위한 어떠한 이유도 필요하지 않다.


이제는 캐리어가 아닌 내 몸 만한 배낭을 매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겠지.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가 헤어지면서 그냥 그렇게 또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겠지.

그 여정의 끝에서는 '미치도록 행복했다. 나 잘 태어났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내가 있기를.

2016년 12월 21일, 꼬맹이여행자의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 시작됩니다.


http://blog.naver.com/punytrave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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