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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수도원 방문기

by 겨울딸기

한국도 3월은 제법 쌀쌀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봄이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선 계절도 마음도 여전히 겨울이다. 낯선 곳인데다 날씨까지 궂으면 참말로 견디기 힘들다. 그런데 2019년 3월 10일, 날씨가 너무 좋다. 어제는 잔뜩 흐렸는데 오늘은 햇빛이 반짝인다. 예보엔 일주일 내내 흐릴 거라고 했는데.

이런 날 썰렁한 아파트에 갇혀있을 수 없다. 남편이 루스끼 섬에 수도원이 있다면서 한번 가보잖다. 성당도 아니고 수도원? 뭔가 경건하고 비밀스럽고 신비할 거 같은 느낌이 왔다. 오케이하고 교통편을 알아보니 집 앞 정거장에서 24d 버스를 타면 된다. 서둘러 씻고 나가 20분쯤 기다린 뒤 탔다. 대형 버스가 아닌 작은 밴에다 가끔 오는 버스라 사람이 많다. 다행히 나는 운전석 옆에 앉고 남편은 뒤에 탔다. 안전벨트를 맬까 하다 그냥 뒀다. 차가 워낙 고물이라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보인다. 의자에 꾀죄죄하게 구겨져 있는 벨트를 보니 잠기긴 해도 풀리진 않을 거 같아 염려가 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선 다들, 기사님조차 벨트 맨 걸 보는 게 드무니 나도 패스.


운전석 옆에 앉아 기사 양반 운전 모습을 보니 간 떨어지겠다. 운전하면서 버스요금으로 받은 돈 계산하고(블라디보스토크는 현금으로 요금을 내야 한다. 이걸 다 운전기사가 한다.) 이것저것 물건 정리하고... 브레이크 밟을 때마다 끽끽 소리 나고... 속도는 고속버스 뺨치고. 그래도 앞에 앉으니 앞으로 옆으로 전망이 좋아 사진 찍기는 안성맞춤이었다.


금각교 지나 루스끼 대교 건너 루스끼 섬에 들어가 북한섬 가기 위해 회차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거기부터 흙길이다. 울퉁불퉁 자갈길에 꼬불꼬불 오르락 내리락, 그럼에도 기사 아저씨의 질주 본능엔 주저함이 없다. 커브길에서도 과감히 앞 차를 추월한다. 정말 심장이 쫄깃쫄깃하다. 우리 차 앞서 다른 차가 있으면 먼지가 뿌옇게 일어나 꼭 안개 낀 거리 달리는 거 같다. 창문을 닫아도 다 헐거워서 먼지가 고스란히 안으로 스며든다. 목이 칼칼하다. 흙 한 숟갈은 퍼먹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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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양 옆으론 그냥 숲이다. 한참을 가니 오른쪽으로 바다도 보이고 폐건물도 보인다. 그렇게 몇 킬로를 달리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가게 하나 있고 집 몇 채 있다. 우린 그곳을 지나 또 한참을 달렸다. 갑자기 멀리 공장같은 아파트가 등장하고 포장길이 나온다. 버스 안에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내려서 우리도 내려야 하나 했는데 맞다. 우리가 내릴 곳이다. 다운타운에서 차 타고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무슨 오지에 온 것 같다. 물론 러시아 사람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 도착한 나에겐 이곳이 오지 같았다.



버스가 떠나고 그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니 수도원이 나타난다. 우선 수도원에서 좀 더 앞에 말끔한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이길래 뭔가 하고 가봤다. 다가가 보니 아파트다. 그 아래 좁은 길이 있다. 양철 담장이 쭉 이어져 있고 그 담장 끝에 바다가 보인다. 녹슨 담장이 을씨년스럽다. 사람이 사는 집인가 그냥 창고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날이 풀려 바다 얼음도 몇 주 전과는 사뭇 다르다. 그땐 단단한 유리 같았는데 오늘은 반쯤 녹은 슬러시같다. 그럼에도 바다 한 가운데서 낚시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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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바다에는 내려가지 않고 해변을 따라 걷다 다시 수도원으로 갔다. 커다란 나무 대문이 꼭 닫혀 있어서 들어가도 되는지 잠깐 망설이는데 퉁퉁한 러시아 아줌마가 나온다. 웃으면서 들어가도 되는지 손짓을 하니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고 한다. 물론 말은 전혀 못 알아들었는데 얼굴에 띤 미소와 몸짓으로 알아듣고 들어갔다.

대문 옆에 경비실 같은 작은 공간이 있는데 우유와 빵을 판다고 써 있다. 축제에서 보니 성당이랑 수녀원, 수도원 이런 곳에서 우유, 빵, 꿀을 만들어 파는 걸 봤는데 이곳도 그런가보다 짐작했다. 근데 오늘은 우유는 없다는 안내문이 걸려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봄맞이로 마당이랑 건물을 단장하는 중인지 좀 산만했다. 본당이 있고 벽돌 건물 몇 채와 일반 건물이 보인다. 축사도 있고 수도원에서 먹는 먹거리를 가공하는 공간도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그 앞에 사자처럼 무섭게 생긴 맹견이 목이 찢어져라 짖어대는 통에 얼른 발길을 돌렸다. 마당이 정돈이 안 돼 보였지만 좀 더 따뜻하면 아늑하고 예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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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사람들이 없어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도 되는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는데 한 벽돌 건물에서 아이들도 나오고 어른들도 나오는 게 보였다. 나도 용감하게 들어갔는데 러시아 할머니 한 분이 그 안에 있는 다른 문을 열고 나온다. 손짓 눈짓 해가며 알아들은 바, 식당이고 우리도 들어갈 수 있단다. 마침 점심을 어디서 먹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잘 됐다. 이곳에서 끼니를 해결해야겠다 하고 들어갔는데 우리가 생각했던 일반 카페가 아니다.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예배 후 식사하는 공간인 거 같았다. 벽에는 성직자 그림들이 걸려있고 오래 돼 보이는 가구들과 장식품들이 벽을 따라 놓여 있고 긴 테이블과 의자들이 가장자리에 둘러져 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땐 젊은 러시아 청년이 밥을 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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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같이 들어와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르니 러시아 마피아 영화에서나 볼법한 단단한 어깨에 금니를 한 60대쯤 보이는 러시아 아저씨가 한 분 나왔다. 할머니가 아저씨에게 뭐라뭐라 하는데 처음엔 좀 당황하는 빛을 띠었다. 우리는 최대한 공손한 얼굴로 잠자코 서 있었는데 일단 앉으라고 손짓한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빵을 내왔다. 테이블 위에는 큰 볼에 먹다 남은 수프와 삶아 으깬 감자가 있는데 그 걸 덜어먹으라며 접시도 준다. 수하라는 생선수프다. 다 식어서 좀 아쉬웠는데 구수하고 맛있다. 허브를 많이 넣어서 차가워도 비리거나 느끼하지 않았다. 동남아 요리 같았다. 커리향이 많이 났다. 빵은, 러시아 주식인 흰빵과 검은빵 두 종류를 썰어서 바구니에 담아 왔는데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니 맛났다. 아저씨가 이번에는 컵을 가져다 준다. 테이블에 있는 차를 따라 마시라고 했다. 차가 다 식은 걸 알고 포트에 뜨거운 물을 끓여다 주었다. 빵과 수프, 차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웠는데 곧 이어 생선튀김도 주고 금방 구운 블린과 꿀, 연유를 가져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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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이 덥수룩한 젊은 남자가 부엌에서 나와 불도 켜준다. 실내는 전혀 어둡지 않았는데 불을 켜니 분위기가 더 좋다. 연유는 수도원에서 만든 것인지 아주 부드럽고 고소하고 달달했다. 슈퍼마켓에서 사 먹는 연유가 아니다. 건강한 단 맛이다. 러시아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기억나는 걸 꼽으라면 단연코 여기서 먹은 블린이다. 이 세상 최고의 부드러움과 달달함을 맛본 거 같다. 뜻하지 않게 이런 대접을 받으니 아주 행복했다. 식사를 다 하고 감사 인사를 하려고 부엌쪽으로 기웃거리다 아저씨랑 눈이 마주쳤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우리 마음을 알아챈 듯 환하게 웃는다. 번쩍이는 금니가 눈부시다.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돈을 건넸는데 두 손을 엑스자로 만들며 고개를 젓는다. 그냥 나오기에는 너무 미안했는데... 일단 고개를 푹숙여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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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한 곳에서 대각선으로 맞은 편에 본당으로 생각되는 건물이 한 채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데 남편은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되겠냐며 망설인다. 그러나 내 생각에 폐쇄된 수도원이 아닌 이상 교회가 사람들을 막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배 보는 곳이겠거니 짐작하며 들어갔다. 내 생각이 맞았다. 예배당이다. 한 러시아 가족이 둘러보며 기도하고 있었다. 이 교회는 그동안 봤던 러시아 성당이랑 달리 천장이 높지 않았다. 작고 아담했지만 안은 아주 화려했다. 향 냄새가 가득 했다. 실내를 둘러보고 헌금함에 돈을 넣었다. 밥 맛있게 먹은 고마움과 기도하는 마음 함께 넣었다.

다른 성당처럼 이곳도 예배당 입구에 성화며 성경책, 성물, 초 등을 전시하고 판매하는데 그곳을 구경하는 중 젊은 성직자가 나와 나를 보며 자기 머리를 만지고 뭐라한다. 아, 머리를 가리라는 뜻. 예배당 안에 있을 때 코트 모자를 썼다가 나오면서 벗었는데 쓰라는 얘기다. 성직자는 우리에게 러시아 말을 하냐고 물었다. 아주 조금 한다고 하니 그럼 영어는? 그래서 한다고 하니 영어로 물어본다. 뭐 살 거 있냐고. 그리고 수도원에서 만든 꿀도 판매한다며 보여준다. 긴 얘기를 나눈 건 아니고 뭐 이런 저런 사소한 얘기 나누다 고맙다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오니 봄빛이 더 환해진 거 같다. 배는 부르고 햇빛은 따사롭고 좋다.


아까 내렸던 버스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오가는 버스가 딱 한 대밖에 없고 금방 어두워질 거 같아 슬슬 시내로 나가는 게 좋겠다 싶었다. 정거장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곧 버스가 오겠다. 큰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지만 올 때 탔던 것과 같은 봉고차가 왔다. 당연히 서서 가겠군. 그런데 다행히 내 앞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얼마 안 가서 내려 그 자리에 앉고 또 금방 옆 자리에 있던 사람도 내려 남편도 같이 앉았다. 배는 부르고 창으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니 노곤한 게 잠이 솔솔 온다. 그렇게 금각교까지 오는 동안 졸다깨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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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시내는 참 작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서 시내까지 걸어가면 한 20분 걸린다. 그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집으로 오면 30분쯤 걸린다. 그 안에 웬만한 볼 거리 다 있다. 물론 루스끼 섬은 예외로하고. 블라디보스토크 구경와서 볼 거 없다는 얘기 많이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갈 곳이 뻔하다. 하지만 국내 여행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숨은 장소가 꽤 있다. 조금 용기를 내서 모험을 즐긴다면 뜻밖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용기와 부지런함 그리고 미소와 따뜻한 눈빛이면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많은 걸 나눌 수 있는 거 같다.


**St. Seraphim Monastery

성 세라핌 수도원은 2002년 문을 열었다. 이곳은 러시아 극동 지역에 있는 유일한 수도원이다. 수도원의 본 예배당은 러시아 혁명 전까지 34 시베리아 보병대 교회였다.(루스끼 섬은 극동 지역의 중요한 군사지대였다. 지금도 군부대가 곳곳에 있다. 이곳에서 근무하던 군인들을위한 교회였다고 한다.) 지금은 근처 마을 사람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수도원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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