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아름다운 말이다.
비밀스런 종교의식.
슬픈 의미.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의미.
여러 의미를 함의하고 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김영하님의 소설을 읽고 있다.
인생의 마지막을 시적인 은유로 장식한 채 죽어간 예술가의 종말에 대해 논한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을 선택할 권리가 있지않을까?
천수를 누리며 배부른 돼지가 되어 아무 생각없이 삶의 시간들을 매끈한 비단길로 채울 수도 있고
가난하고 고독하게 대중들은 모르는 삶의 비의를 찾아
평생을 헤매이며 결국 위대한 작품을 유작으로 남기고 홀연히 사라질 수도 있다.
어떤 인생의 비의는 길 위의 여정에 있어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채
속박이 느껴지면 도망가는 걸 반복하듯 살아갈 수도 있다.
인간들의 이기심에 환멸을 느끼며 숲 속으로 들어가
자연인이 되었다가
그럼에도 타인의 살냄새가 그리워
다시 마을로 돌아와 곁가지를 맴돌며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어찌 산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운이 좋다면 후대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나 역시 너와 같이 비의를 찾아 헤매였었다.
방황과 유랑과 정처없는 고독 속에서 너와 같은 길을 걸어왔었다.
먼저 걸어간 선인들의 삶의 의미를 찾아
걷다보니 그 걸음이 역사가 되었단다.
이렇게 전달이라도 할 수 있으리라.
문득 거울 속에 기름기 가득 흐르는
살찐 욕망의 덩어리를
부인하고 싶어지는 시간이다.
의미를 찾고 싶다.
그게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