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강하다
사랑스러웠던 딸의 갑작스러운 우울증과 등교 거부.
어떤 노력도 효과 없고, 초등 졸업도 불확실했던 상황.
경찰, 119에서 여러 번 방문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삶.
점점 우울의 늪에 빠져가는 딸과, 무력감과 괴로움에 자신을 모두 잃어버렸던 나.
2023년은 우리에게 너무나 비참하고 힘든 한 해였다.
겨울 방학 동안의 노력
응급입원을 통해 기분 조절 약 정도만 먹고 있던 아이의 상태는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아이의 동의를 받고 동네 병원에서 검사를 통해 ADHD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약을 바꾸기 시작한 이후로 점점 나아지고 있다. 처음엔 약의 부작용으로 밥을 못 먹어 힘들었지만, 병원과의 상담을 통해 용량을 줄여 점점 올리는 방식으로 접근하니 울렁거림 없이 적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는 중학교를 배정받았다. 우리 집은 이전의 다니던 초등학교(아이의 발병의 원인이 된 곳)의 아이들이 많이 배정받는 중학교와 조금 더 떨어진 중학교를 다 배정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아예 한 곳의 옆으로 이사하지 않는 한 내가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이전 학교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학교가 아닌 곳으로 배정되길 막연히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삶이 그렇게 쉽지 않지. 역시나 좀 더 가까운 그 학교로 배정이 되었다. 그 곳이라는 것 만으로 또 등교를 거부하면 어떡하지.. 란 걱정부터 올라왔지만 너무나 다행히도 아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고, 교복도 맞추고 천천히 입학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겨울 방학은 참 길다. 우리 때처럼 2월 초 등교해서 중순에 종업식을 하는 게 아니라 아예 1월 초에 학기를 끝내 버리니 3월까지는 참 길고도 길다. 중학교 입학 준비와 별개로 한껏 늘어져버린 아이의 일상이 걱정이다. 이미 11월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으니 집에서 보낸 시간이 4개월가량 돼 간다. 입학식 2주 전, 아침에 일어나 예비소집일에 가야 할 텐데.. 잘 갈 수 있을까?
떨리는 예비 소집일
익숙하지 않은 길이라 아침에 아이를 데려다주고 출근하기 위해 출근 시간을 늦추었다. 그리고 아이를 일찍부터 깨웠으나 전 날 예비소집일에 가겠다던 아이는 또 엉뚱한 소리를 해대며 나를 밀어낸다. 결국, 아이는 학교에 가지 못했고 나 혼자 들러 유인물을 받은 뒤 출근했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퇴근했으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이의 축 쳐진 모습에 티 안 내고 앞으로 준비 잘해서 학교 잘 다니자고 하니 알았다고 한다. 그래, 예비 소집일 못 간 게 무슨 대수람. 가볍게 생각하기로 한다.
무사히 입학
요즘은 중학교 입학식에 안 가는 게 트렌드라던데.. 가도 될까? 고민이 되었지만 살짝 운을 떼어 보니 내가 오길 바라는 것 같아 오전 휴가를 내고 입학식에 참석하기로 했다. 전 날 스포츠 머리로 짧게 자른 아이가 바지 교복을 입으니 꼭 남학생 같기도 하지만, 보이시하고 늘씬한 모습에 예쁘기도 하다. 친구와 만나서 가겠다며 씩씩하게 집을 나서는 뒷모습을 보니 내 마음이 이제 좀 편해지려나.. 하는 희망이 살짝 생긴다. 그래, 그렇게 나서면 되는 거야.
두어 시간 후, 입학식 시간에 맞추어 대강당에 들어서자 아직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한 아이들이 낯선 교복을 입고 모여 있는 모습들이 귀엽다. 그중에 까까머리 딸이 눈에 띈다. 살짝 가서 인사하니 씩 웃는 게 그래도 엄마가 오길 바랐던 것 같다.
네 등교를 위해서라면, 퇴근쯤 늦게 해도 괜찮아
전 날 친구와 만나 씩씩하게 가는 걸 보고 안심하고 아이를 깨운 뒤 출근했다. 그러나 웬걸, 가는 길에 엄마의 카톡이 연신 울린다. 아, 또 시작인 건가. 역시나 그날 아이는 택시를 불러 등교했고 지각도 했다. 중학교는 초등학교와 다르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제시간에 등교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과 가정에서의 지도를 부탁하시는 내용을 담은 문자를 보내셨다. 아이의 작년 상황에 대해 말씀드린 뒤 내일부터 직접 챙겨서 제시간에 보내기로 약속드렸다.
"엄마, 나 지각해서 청소했다. 선생님 진짜 무서워."
수업 첫날부터, 벌을 받은 아이가 솔직히 쌤통이기도 했다. 아침에 연락했을 때 자기를 답답하게 한다며 톡 쏘더니 학교에선 별 수 없나 보다.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아이에게 청소를 시켜준 학교에게 감사함까지 들었다.
"내일부터 엄마가 데려다줄게. 조금 늦게 출근하고 퇴근하면 돼. 그렇게 하자."
그리고 그렇게 아침마다 아이를 데려다주고 출근하고 있다. 평소 5시 반에 퇴근하다가 6시 반에 퇴근하려니 몸이 두 배 더 힘든 느낌이지만, 매일 불러주는 택시비도 아깝고 무엇보다 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가 크기에 학기 중에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또, 엄마의 하소연 카톡을 받는 것도 힘들었는데 그것도 해결되니 늦어진 퇴근 시간쯤은 괜찮다. 아침에 아이가 준비하는 동안 가볍게 청소도 할 수 있다. 지금 상황에선 좋은 점이 더 많다.
엄마를 보면 숨이 막혀
그렇게 등교가 무사히 진행되나 했으나, 역시나 그러면 인생이 아니지. 2주쯤 엄마차를 타고 다니던 아이는 아침에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압박이 느껴지는지 답답해 하기 시작했고, 엄마차 타고 등교하기 부끄럽다고 자전거를 사달라고 난리다. 그러나 학교 옆은 크게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오르막길에 큰 트럭들이 쉴 새 없이 다닌다. 먼지 때문에 물도 흠뻑 뿌려놓아 어른도 위험한 길이다. 게다가 아이의 자전거 타기 실력은 일반 도로를 다니기엔 아직 부족하다. 따릉이로 연습 한 뒤 결정하자고 일단 시간을 벌어놓은 상황이다.
엄마랑 다니기 불편하면, 일찍 일어나 걸어가면 될 텐데 그럴 의지는 아직 없어 보인다. 당분간은 기분 좋게 집에서 나오게끔 해서 데려다줄 생각이다. 그 과정안에서 아이의 아픈 말들이 내 맘을 많이 힘들게 하지만, 사춘기니까 이해하고 잊으려 한다. 그 말들을 다 새겨 놓으면 내가 너무 아프기 때문에 잊어야 한다. 작년처럼 방에 숨지 않고 세상에 나온 게 어디냐며 나를 위로한다. 지금은 아이가 적응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그동안 아이의 새 학기 적응과 내가 하는 공부로 글 쓸 시간이 영 나질 않았다. 아이가 학교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아 급하게 몰아서 기록을 남긴다. 계속 이렇게 잘 지낼지, 아니면 또 다른 사건이 생길지 앞 날은 알 수 없기에 하루를 잘 살아가는데 집중하고 있는 요즘이다.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몸이 힘들면 힘든 대로,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다는 감사함 하나로 버텨내고 있다.
제목에 '까까머리 여중생'이라고 썼듯이 아이의 머리는 중경삼림의 여주인공과 같이 짧다. 아이가 까까머리가 된 사연은 별 거 없다. 그저 입학식 전날 배시시 웃으며 엄청 짧게 자르고 싶다고 하여 여러 번 확인을 받고 미용실에 데려갔을 뿐이다. 본인의 중학생 콘셉트가 보이시한 것인지, 그것이 이루어지자 매우 만족하고 있다. 얼굴이 작고 몸이 늘씬해 나름 이쁘고 멋지기도 하다.
우리 까까머리 여중생이 즐거운 중학 생활을 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맨날 나만 힘들다고 죽는소리했지만, 사실 작년에 나보다 더 힘든 건 아이였다. 아이가 다시 그 아픔을 겪지 않도록, 나도 더 주의 깊게 아이를 돌봐야 한다. 눈빛이 점점 맑아지는 아이의 노력에 감사하며 봄을 맞고 있다.
사랑한다, 까까머리 여중생.
그래도 엄마한테 너무 밉게 말하지는 말아 줘. 나중에 후회할 것이야!
사진 출처 : 중경삼림, https://hypebeast.kr/2020/9/wong-kar-wai-chungking-express-sequel-remake-2020-in-produc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