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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새벽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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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인경 Jun 03. 2022

이랑에게 진 빚

이랑,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를 읽다가

 좁은 인디 음악 씬에서 함께 활동하면서도 이랑과는 일면식이 없는 사이다. 공연이 겹친다거나 어떤 뒤풀이 자리에서 만난다거나 그런 일이 한 번 정도는 있을 법 한데 그런 변변한 기회가 없었다. 합정역 부근 상가 엘리베이터에 같이 탄 적은 있다. 나는 행여나 눈이라도 마주칠까 재빨리 시선을 돌렸기 때문에 그는 아마 날 못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니다, 애초에 내 얼굴을 모를 수도 있다. 그냥 내가 속한 밴드의 이름 정도만 얼추 들어보았을 수도 있고, 그마저도 아닐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많아지면 도저히 인사를 건넬 수가 없다. 솔직히 고개를 너무 빨리 돌렸기 때문에 내가 본 게 이랑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접점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이랑은 멀티-인스트루먼트 뮤지션 이혜지와 함께 공연을 꾸리는 일이 많은데, 나도 종종 이혜지와 함께 무대를 준비한다. 또 이랑과 나는 레이블 '유어썸머'에 소속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같은 레이블 소속이라고 뭔가를 같이 하진 않기 때문에 이 역시 '아는 사람이 겹친다' 정도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나는 이랑이 흥미로운 사람이라서 좋아한다. 많은 사람이 그럴 것이다. 음악이 좋아서 찾아들어간 SNS에서 멋진 공연 클립을 발견하고, 공연 때 입은 의상에 감탄하다가 주변에 재미있는 친구들이 많은 것 같아서 또 한 번 감탄한다. 때로는 영화감독이기도 하고, 몇 권의 책을 집필한 작가이기도 하다. 심지어 일본어도 잘하고 만화도 잘 그린다. 이랑에 관해서라면 흥미로운 게 떨어지는 일이 없다.

 나는 이랑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기 때문에 그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요즘은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를 읽고 있다.


 <좋아서 하는 일에도 돈은 필요합니다>, 이랑

 책은 이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유명한 사건 '한국대중음악상 트로피 퍼포먼스'의 전말에 대해 알려준다. 유쾌한 이벤트 정도로 여기거나 조금 더 나아가 음악가의 생활고에 대한 관심을 갖는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일부 비난의 여론도 있었던 걸로 안다.(내가 보기엔 그저 미친 엄숙주의자들이다.) 하지만 이랑은 이럴 때 우회하는 법이 없다. 책의 첫머리가 트로피 퍼포먼스다.


 이랑의 다양한 직책(?)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인플루언서'가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인플루언서'라고 하면 쁘띠한 사진과 공동 구매가 자동완성으로 생각나 버리기 때문에 좀 오해를 살까 싶긴 하다. 이랑은 페미니즘, 퀴어, 인권 등 첨예한 사회 이슈를 가사로, 글과 인터뷰로, SNS로 용기 있게 말하는 사람이다. 본인의 사상을 전달하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면에서 이랑은 단언컨대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이랑은 책에 자신의 수입에 관한 이야기도 명명백백하게 써두었다. 그가 공개한 어느 두 개월은 한 달 수입이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지금 책이 옆에 없어서 정확한 액수는 모르겠다.) 공연, 강연, 인세 수입 등 모든 대외 활동을 포함한 금액이라고 한다. 이게 순수익이 아닌 이상 악기 구입이든, 앨범 제작비나 공연장 대관료 등의 지출도 분명 발생할 테니 먹고살기 빠듯한 액수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랑이 자신의 궁핍한 처지를 드러내는 건 동정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대우가 필요해서다. 잡지 촬영, 공연, 인터뷰 등 화려한 겉모습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생활의 가난은 모자란 재능이나 게으른 탓이 아니다. 이건 거대한 일련의 미지급 사태다.

 이랑은 예술이라는 명목으로 일에 제대로 금액이 매겨지지 않았던 사례들을 소개한다. '너도 홍보되니 좋잖아' 같은 논리로 무료 노동을 요구하는 업체도 꽤 있다. 이랑은 자신의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인터뷰 페이로 20만 원을 책정했고, 공연 섭외도 밴드 규모에 따라서 세세하게 섭외 비용을 정해두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SNS와 책에 적어두었다. 이랑의 '가격표 정책'은 결국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었을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이랑의 페이 (역)제안에 인터뷰를 취소한 잡지사도 있고, '너는 왜 (예술가가) 돈 이야기만 하냐'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발생할지 모를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랑은 말하는 쪽을 선택했다. 나는 그가 개인적 안위를 넘어 대의에 봉사하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본다. 누군가는 이야기해야 바뀌는데, 앞서가면 튀어나온 못이 되어 망치를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게 맞는 길이라면 내가 먼저 걸어가 보겠다- 인 것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몇 번 아주 유명한 연예기획사에서 가사 작업 의뢰를 받은 적이 있다. 의뢰비라거나 계약금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없길래 스크롤을 올려 이메일 상단에서부터 다시 읽어봤지만 역시 없었다. 그쪽에서 마음에 들면 쓰고 아니면 마는 것이다. 내가 거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은 아무 보상도 받을 수 없다. 아니, 이럴 거면 그냥 공모전을 열지?


 돈 이야기는 천박하니 드러내 말하지 않는다는 건 설날 세뱃돈 봉투를 바로 열어보지 않을 때나 유효한 말이다. 누군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유형의 혹은 무형의 뭔가를 만들었다면, 그리고 누군가 그걸 사용하고 싶다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게 음악이든 뭐든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인데 고작 이런 것에 발목이 잡혀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소위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예술의 순수성을 기대하며 무료 봉사를 원하는 사람들의 의도는 순수한가?

 어쩌면 예술가란 무릇 돈을 밝히면 안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안 줘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일 화폐의 교환이라는 자본주의 가치 체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리 집에 와서 설거지라도 해라.


 이랑은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주변 음악가들과도 터놓고 얘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남의 눈치를 보며 속내를 감추는 음침한 사람은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돈 얘기로 자신의 예술인 에고가 흔들릴까 염려하는 사람 역시도 그의 대화 신청을 거절할 것이다. 하지만 담대한 이랑은 책에 자신의 월수입까지 적어가며 사회의 틀을 무너뜨려 나간다. 나는 그 박력이 좋다. 우리는 모두 깨질지언정 앞장서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 심지어 이랑을 비난하는 사람마저 그의 용기에 덕을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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