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에 넣으려고 청경채를 씻다가 달팽이가 나왔다. 엄지손톱 길이만 한 조그만 민달팽이었다. 춥고 어두운 냉장고 신선칸 안에서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있던 걸까. 일단 급한 대로 투명한 테이크아웃 컵에 옮기고 청경채를 잘라 넣어주었다. 키친타월과 고무줄을 이용해서 지붕을 덮고 공기구멍을 뚫었다. 달팽이는 습한 걸 좋아할 테니 분무기로 적당히 물을 뿌려주었다.
하룻밤 사이에 엄청 커져있는 거 아냐? 괜스레 기대하며 들여다봤지만 어제와 비슷한 것 같았다. 그래도 야채도 먹고 똥도 싸고 끈적한 흔적을 많이 남겼다. 배추를 잘라서 주었는데 청경채보다 더 잘 먹는 것 같았다. 달팽이는 좁은 플라스틱 컵 안에서 더듬이를 세우고 이리저리 잘 돌아다녔다. 팽달이라고 임시로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이름자 앞뒤를 바꿔 부르는 걸 좋아하는 유재석을 따라한 것이다.
팽달이는 네 번째 날 죽었다. 물을 너무 많이 주면 빠져 죽을까 봐 분무기로 매일 적당히 뿌려주었는데 이 날은 외출하기 전에 물을 뿌려주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팽달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컵 안은 건조하고 팽달이는 작아져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문채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물을 뿌리고 건드려보아도 꼼짝 않는 팽달이를 보며 제 때 물을 뿌려주지 않은 일이 후회되었다. 아니, 그 이전에 왜 나는 건물 화단에 팽달이를 내보내지 않았나. 추운 냉장고에서 일주일을 버틴 이 친구가 바로 거친 야생으로 돌아가는 일은 어쩐지 가혹하다고 그 때는 생각했다.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할 거면서. 나는 지극히 인간스러운 사고방식으로 달팽이를 데리고 있다가 죽게했다.
그날 밤 꿈에 팽달이가 나왔다. 플라스틱 컵을 들여다보는데 팽달이가 죽지 않고 쌩쌩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히려 덩치도 약간 커진 것 같았다. 꿈속의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내가 착각했구나. 죽은 게 아니라 잠시 안 움직이는 거였어. 너무 다행이다! 나는 평소 자각몽을 꾸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날 밤에도 그게 진짜인 줄만 알았다.
쿠션 위에서 잠이 든 고양이를 보고 있자면 불쑥 무서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혹시 지금 자는 게 아니라 죽은 거라면 어쩌지? 밑도 끝도 없는 망상이다. 우리 집 고양이는 천성이 느긋한지 자세를 흐트러트리고 자유로운 포즈로 내키는 대로 잘 때가 많기 때문에 종종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정말로 죽는 날이 온다면 저렇게 눈을 감고 꼼짝 않고 있을 텐데, 내가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이 손도 못써보고 죽은 거라면 어쩌지? 이건 마치 건물 옥상에서 '내가 갑자기 미쳐서 난간 너머로 점프하면 어떡하지' 따위를 생각하며 손을 떠는 일과 마찬가지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알지만 일단 찾아온 불안은 어떻게든 흔적을 남긴다. 바보같이 겁이 덜컥 나서는 미래의 불행을 예행연습한다. 어차피 익숙해질 것도 아니면서.
평화롭게 잠든 고양이를 보다가 죽은 달팽이를 떠올리다니 감정 낭비가 아닐 수 없지만 가끔은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역시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제주의 한 부부가 생각난다. 함께 지내던 고양이가 갑자기 죽은 뒤 남자는 다시는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겠다고 했다.
죽음은 정말 별로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우리 집 고양이보다 오래 살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죽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어쨌든 어느 쪽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달팽이도 고양이도 나도 죽는다. 마치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양.
죽음은 어떻게든 우리를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피해 다닐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도 마음에 들이지 않고 어떤 새로운 이름도 짓지 않는다면 많은 죽음을 외면할 수 있을 것이다. 태어나지도 않은 것이 죽을 수는 없을테니까
하지만 나의 관심은 덜 슬퍼하는 게 아니라 더 사랑하는 일에 있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은 사람들도 아마 있을 테지만 일단은 이게 내가 아는 길이다. 남은 인생 동안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슬퍼할 수밖에.
제주의 그 남자는 그 이후 마당에 찾아온 아기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집을 지어주었다고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