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새벽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인경 Sep 12. 2022

내가 비건이 된 사연

어쩌다 보니 비건 N년차

어렸을 때부터 우유부단한 성격이었다. 뭔가 결정해야 할 때면 이런저런 핑계로 끝의 끝까지 미루다가 억지로 하나를 선택하곤 했다.(또는 자연스럽게 선택당하거나.) 왼쪽과 오른쪽을 결정하지 못해 우물쭈물하다가 가운데로 굴러온 페널티킥을 우연히 막아낸 골키퍼처럼 가만히 있다가 뭔가 되기도 했다. 아니기도 하고.


요즘은 묻는 사람이 얼마 없지만 10여 년 전에는 '어떻게 음악가의 삶을 선택하게 되었나'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돈은 안되지만 꿈을 좇는 궁핍하고도 도전적인 삶'이라는 프레임을 이미 짜고 질문한 경우가 많았고 은근히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듯도 했다. 질문자의 욕구를 조금 충족시켜 줘도 좋았으련만 나는 늘 '그냥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흘러왔다'라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고등학교 기타부, 대학 밴드 동아리, 인디밴드로 활동하면서 거창하진 않아도 늘 음악과 함께하는 삶을 생각해왔기 때문에 반대로 음악가로 살지 않는 것이 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우유부단하게 자리를 지키다 보니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음악가라는 이름표를 달고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 음악보다는 '어떻게 비건이 되었느냐'는 질문을 더 많이 받는 듯하다. 어쩌면 음악가보다 더 희귀한 사람들이라 유니콘 보듯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호기심에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물어오는 사람도 있다. 비거니즘에 관해 호감이 있는 사람은 약간의 멋진 스토리를 기대하기도 하는데, 내 비건 인생의 그럴듯한 탄생 설화로 읊어주고 싶어도 딱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럴 땐 그냥 '고양이를 키워서요...', '친구가 하길래...'라고 우물쭈물 말하는데, 그러면 질문자도 금세 흥미를 잃곤 한다.


채식을 하느냐, 동물을 먹느냐의 기로에 섰을 때 나는 단호하게 어느 한쪽으로 결정 내리지 못했었다. 둘 다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고, 한 번 결정하면 내 성격상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식을 하는 건 쉬운 선택이다. 그냥 살던 대로 살면 되기 때문에 별다른 결심 없이도 선택할 수 있는 편한 길이다. 하지만 채식은 동물권,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 자명했다.


역시나 우유부단한 나는 고민에 빠졌다. 당장 결론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관련 지식도 쌓고 생각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결정을 내릴 때까진 어떡하지? 일주일 뒤가 될 수도 있고 한 달 뒤가 될 수도 있는데, 결정이 나기 전까지의 기간에는 어떻게 먹어야 하는 걸까? 나는 비건으로 살지 말지 결정이 날 때까지 일단은 비건으로 살아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당분간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면 동물을 죽이지 않는 쪽이 무해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뭐라고 내 편의와 입맛을 위해 다른 동물의 자유와 생명을 빼앗기까지 하나 싶었다.


이렇다 할 박력 있는 스토리도 없이 스멀스멀 비건이 된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의 셀프 임상 결과 몸과 마음이 더 건강해졌으니 비건이라는 선 이 쪽에 우물쭈물 머무른 일이 잘 결정한 일이 되었다. 비건으로 살아야 할지 말지 고민 중인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나와 비슷하게 우유부단한 성격이라면, 고민이 끝날 때까지 육식을 유예해보면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 인생은 왜 영화만큼 재미있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