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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새벽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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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인경 Sep 13. 2022

내 인생은 왜 영화만큼 재미있지 않을까

영화는 재미있고 내 인생은 권태롭다

 영화나 드라마가 보여주는 하루는 참 재미있다. 흥미로운 사건, 매력적인 주인공, 멋진 풍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편집'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 주인공도 이런저런 일상생활이 있을 텐데, 그중 가장 흥미로운 일들만 잘 추려서 우리에게 보여준다. 제아무리 영화배우가 등장하더라도 주인공의 하루 24시간 모두를 촬영해서 편집 없이 상영한다면 꽤 지루하지 않을까. 멋진 식사를 하고 나면 15분 정도는 설거지를 해야 할 테고, 주인공이 어린 시절 333법칙을 제대로 배웠다면 식후 3분 내로 3분 동안 이를 닦을 것이다. 그것도 하루 세 번 씩이나. 3분 간의 양치나 15분 간의 설거지를 편집 없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하지만 그게 강동원이라거나 그러면 얘기가 좀 다를 수도 있다.)


 살다 보면 영화 같은, 마법 같은 순간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빛이 점멸하듯 잠깐이고 인생을 대부분 채우는 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상이다. 반짝이는 몇몇 순간을 위해 이렇게 많은 시간을 시시하게 보내야 하다니 인생이란 뭘까, 회의가 들만도 하다. 산다는 건 아무래도 가성비가 너무 떨어지는 일 아닐까.


 길고 긴 인생 여로를 생각하다 보니 그보다 훨씬 더 긴, 영원에 가깝게 사는 존재들이 떠오른다.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신, 악마, 뱀파이어, 엘프 같은 상상의 존재들 말이다. 그런데 내가 진심으로 어이없어하는 때는 그들이 가끔 영생을 포기하고 필멸자의 삶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순간이다.(영생보다는 아라곤과의 사랑을 택한 <반지의 제왕>의 아르웬이라거나.) 짧은 생을 살아가며 한평생 죽음을 두려워하는 보통의 인간으로서는 이해 밖의 결정이다. 왜 영원히 살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포기해? 끝없는 시간 속에 무뎌진 심장으로 사는 게 너무 긴장감 없고 지루한 거니? 인간의 삶이 다이내믹해 보여서? 나도 필멸자라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다.


 불멸과 영생 사이의 딜레마는 굳이 엘프 종족이 아니더라도 조만간 인류가 맞닥뜨릴 운명일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극복은 공상 과학적 상상력이 아니라 다가올 미래로서 지식 세계에서 충분히 진지하게 검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세대가 그 혜택 또는 저주의 주인공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한 번 상상해볼 수는 있겠다. 영원히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영원한 삶이라는 콘셉트는 인간과 지구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무한정으로 제공받는 시간이라는 재화가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까? 혹시 긴장감 없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편집 없이 방영되는 24시간 다큐멘터리 같이 밋밋함만이 남게 될까? 그렇게 살다 보면 불멸의 삶을 떠나 죽음을 택한 그들을 이해하게 될까?


 보통 사람의 삶은 지루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뱀파이어가 보기엔 짧고 굵게 살다 가는 걸지도 모른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100리터 희석 커피만 마시다 보면 에스프레소를 한 번 들이키고 싶지 않을까. 인류와 초인류 공공의 숙적. 권태. 권태. 권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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