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라랜드>(2016)와 <비긴 어게인>(2014)을 중심으로
*아래 글은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1. 들어가며- 한국에서의 음악 영화
한국의 음악영화 사랑은 유다르다. 해외에서는 반응이 좋지 않았거나 주목을 많이 받지 못했던 영화들이 국내에서 흥행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어거스트 러쉬>(2007)의 경우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국내에서는 2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고, <싱 스트리트>(2016)의 경우 한국에서 영국의 세 배에 달하는 매출액을 기록했다.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영화는 보통 ‘힐링’ 효과를 내세워 마케팅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800만 관객을 동원한 <보헤미안 랩소디>(2018)[1]나 과거의 <맘마미아>(2008), <레미제라블>(2012) 같이 대서사를 다루는 음악 영화는 다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어거스트 러쉬>, <싱 스트리트>, <위플래쉬>(2014) 그리고 <라라랜드>(2016)와 <비긴 어게인>(2014) 같은 영화는 주로 ‘인디’스러운 느낌을 어필한다. 하지만 이 음악영화들의 실상은 전혀 ‘인디’하지 않다. 많은 경우 할리우드 자본을 동원하여 만들어졌거나 대형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이다. 그런 만큼 출연하는 배우들도 결코 ‘인디’스럽지 않다. 이 음악 영화들은 여타 액션 영화와 마찬가지인 상업 영화이지만 그것들에 대항하는 예술 영화처럼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부류의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힐링’이라는 단어가 회귀되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이 영화를 보면 거대한 산업 자본으로 인해 착취된 감수성이 차오르고 치유되는 것 같은 느낌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에 이 경향을 가장 많이 보인 영화는 <비긴 어게인>과 <라라랜드>이다. 두 영화 모두 국내에서 350만을 웃도는 관객을 동원하였고 [2], 추후 ‘힐링’을 주제로 한 TV 프로그램의 제목으로도 차용되었다. 두 영화의 또 다른 공통점은 국내에서 큰 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평론계에서 충분히, 체계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비긴 어게인>의 비평은 씨네21의 김혜리 기자와 이동진 평론가가 라디오 방송에서 짧게 진행한 사례가 전부다. <라라랜드>의 비평 또한 씨네21 비평 지면에서 송경원 평론가가 한번, 김혜리 기자가 ‘영화 일기’에서 한번 한 것이 전부이다. 두 작품 모두 상업 대중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타 상업영화의 대항 예술인 것처럼 소비된다는 사실 외에도, 작품 내적으로 예술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은 작품의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사실 때문에 들통나고 만다.
1-1. 프레드릭 제임슨- 이데올로기적 봉쇄와 유토피아적 충동
이 글에서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비평론을 따라 두 작품에 이데올로기적 봉쇄와 유토피아적 충동이 어떤 식으로 얽혀있는지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국에서 큰 호응을 얻은 이유를 유추할 것이다. 먼저 각 영화의 흐름을 살펴보고 어떤 이유로 호평을 받았는지 살펴본 후, 작품 속에 담긴 예술 이데올로기가 각각 무엇인지 분석하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날카로운 관객에게는 드러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할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정의에는 두 가지가 있다. 긍정적 용법으로는 사회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데 사용되고, 부정적 용법으로는 지배 관계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함으로써 그 지배 관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데올로기는 사회 유지를 위해서 필연적이다. 예술 또한 사회적 현상으로서 일상생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다. [3] 제임슨에 따르면 문화적 산물인 대중예술 안에서 이데올로기적 봉쇄와 유토피아적 충동을 읽어낼 수 있다. "대중예술은 집단의 가장 심층적이고 근본적인 희망들과 판타지를 굴절시키지 않고서는 그것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대중문화는 상상적 해결책들의 서사적 구성과 사회적 조화의 시각적/광학적 환영의 투사에 의해 혁명의 욕망을 억압한다." 하지만 그 혁명의 욕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무의식으로 억압된다. 제임슨이 토대로 한 마르크스주의 해석학의 과제는 텍스트에 고안되어 있는 이 억압된 혁명에 대한 욕망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 징후가 그 텍스트의 유토피아적 요소를 이룬다. 예를 들어 제임슨은 영화 <대부> 시리즈가 마피아 신화를 차용하여 사회적 모순들에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의 이데올로기적 술책을 분석한다. <대부>의 '이데올로기적 봉쇄'는 정치적, 역사적 분석을 윤리적 판단으로 전치시키는 것이다. 동시에 '유토피아적 충동'은 가족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나는 연대의 욕망이다. "유토피아적 또는 초월적 잠재력이라고 부를 이 차원은 대중문화의 가장 타락한 유형조차 갖고 있다." [4]
2.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의 호평의 이유
2-1. <라라랜드>
데미언 셔젤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에 이은 <라라랜드>는 LA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영화이다. 남자 주인공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의 꿈은 자신만의 재즈바를 차리는 것이고, 여자 주인공 미아(엠마 스톤)는 할리우드 배우가 되는 것이 꿈이다. 영화는 이들처럼 LA에서 꿈을 좇는 사람들의 모습을 'Another Day of Sun'이라는 오프닝 곡에 맞춘 공연으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여타 로맨틱 코미디 영화처럼 세바스찬과 미아는 첫 만남에는 서로를 싫어하지만, 그리피스 공원에서의 댄스 시퀀스 'A Lovely Night' 이후로 둘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재즈바에서 춤을 추고, 영화를 보면서, 서로의 꿈을 알아가고 응원하며 즐겁게 지낸다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친구 키이스(존 레전드)의 밴드에 합류 제안을 받으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된다. 미아는 세바스찬이 자신의 꿈을 포기한 것 같아 실망하고, 세바스찬이 밴드 관련 일 때문에 그녀의 1인극을 보러 가지 못하면서 둘은 사실상 헤어지게 된다. 그 후 미아는 배우의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세바스찬이 미아의 캐스팅 콜백을 대신 받고 소식을 전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다. 결국 미아는 배역을 따게 되어 영화 촬영을 위해 파리로 가고, 세바스찬은 LA에 남아 자신의 일을 하기로 결심하여 둘은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영화는 5년 후 그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난다. 미아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뒤를 돌아볼 만큼 유명해졌고, 세바스찬은 LA의 잘 나가는 재즈바의 사장이다. 어느 날 우연히 미아는 세바스찬의 바에 들어가게 되고 둘은 서로 각자의 꿈을 이뤘음을 확인한다. 둘은 '그때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지만 곧 각자의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뮤지컬 영화인만큼 <라라랜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넘기에 능한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일상에 있다가도 한순간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고 주변 배경이 어두워지며 시간이 멈춘 듯한 연출이 많다. 컷이 적고 유영하는 듯한 유연한 카메라 움직임은 그 경계 넘기를 돕는다. 이 현실과 환상의 모호성은 미아와 세바스찬이 살고 있는 LA라는 공간의 특성이기도 하다. 장면 트랜지션으로 두 번 등장하는 야자수와 하늘 풍경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곧 현수막, 벽화인 것으로 드러난다. 또 미아와 세바스찬이 할리우드 스튜디오를 거닐 때 영화 제작자에 의해 제지당하고 그 순간에는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하다가 '컷'을 외치는 순간 다시 보통 목소리 크기로 말하면서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보면 '인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런 풍경을 보고 미아는 '너무 좋다'라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LA라는 장소 자체를 '허구적'이라며 폄하한다. 영화의 제목 '라라랜드 la la land'부터 허황된 꿈을 좇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사는 장소라는 자조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꿈과 사랑에 관한 영화 <라라랜드>는 LA를 포함한 전 세계 곳곳에서 남들이 허황됐다고 말하는 꿈을 좇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영화다. 또 두 주인공이 결국 자신의 꿈을 선택했기 때문에 이어지지 못하는 결말을 '현실적'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것이 '현실적'이기 때문에 더 위로가 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라라랜드>에는 어떤 시니컬한 관객도 무장을 해제할 만큼 환상적인 장면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칭찬하는 마지막 '그때 상황이 달랐다면 어땠을까' 상상 시퀀스 이외에도, LA의 활발한 풍경을 보여주는 등대 장면과 '여름' 몽타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계속해서 회자될 장면일 것으로 예상된다. 혹자는 우디 앨런이 뉴욕을 위해 <맨해탄>(1979)을 바쳤던 것처럼, 데미언 셔젤이 LA를 위한 찬사로 <라라랜드>를 바친 것이라고 평했다. <라라랜드>는 <비긴 어게인>과 달리 해외에서도 비평가와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는데, 북미에서는 그 이유를 미국 대선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다수의 평이다. 당시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국가 분위기가 상당히 침체되어 있었는데, 그 시기에 활기찬 뮤지컬 영화가 나와서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설명이다. [5] <라라랜드>는 2017년 아카데미 시상식을 비롯한 수많은 시상식과 영화제에서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유달리 인기가 많아서 수많은 굿즈가 나왔고 영화 음악 작곡가 저스틴 허위츠의 콘서트도 서울에서 열렸다.
2-2. <비긴 어게인>
<라라랜드>보다 약 2년 전 개봉한 <비긴 어게인>은 감독 존 카니의 두 번째 작품이다. 싱어송라이터 그레타(키이라 나이틀리)는 인디 음악 씬에 있다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남자친구 데이브(아담 리바인)와 헤어지고 이별의 슬픔을 잊기 위해 하루빨리 뉴욕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던 중 친구 스티브(제임스 코르덴)의 제안으로 오픈 마이크에서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것이 가정 문제에 시달리고 직업에 의욕이 없어 우울과 알코올 중독에 찌들어 사는 음악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 후 영화는 간단히 말해 이 두 사람이 함께 음악 제작을 하면서 서로의 고통을 극복하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댄은 그레타를 자신이 일하던 레코드 레이블에 데려가지만 데모도 없고 뭐가 특별한지 잘 모르겠다는 사장의 말을 듣고 그냥 앨범을 자체 제작하기로 한다. 금전적인 제약과 '진정성' 있는 음악을 제작하고자 하는 의도로 두 사람은 세션 인원을 모아 야외 라이브 녹음으로 앨범을 제작한다. 앨범 제작을 하면서 댄은 가족과 가까워지는 모습이 보이고, 그레타는 이별의 상처를 잊은 듯하다. 한편 데이브는 투어 후 돌아와 그레타에게 그녀가 만든 노래가 앨범에 수록된 것을 들려주고 콘서트에 와서 같이 연주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레타는 콘서트장에 가지만 관객이 자신의 노래에 호응하는 모습만 확인하고 돌아오고, 댄은 아내와 재결합한다. 영화의 막바지에 그레타와 댄은 완성된 앨범을 들고 레코드 레이블을 찾아가지만, 그레타는 제작 과정에서 회사가 개입한 부분은 전혀 없는데 수익의 90퍼센트를 회사가 취하는지 모르겠다며 음악 산업에 의문을 제기한다. 결국 크레딧 장면에서 그레타와 댄은 앨범 전체를 인터넷에 1달러에 올린다.
감독의 전작 <원스>를 좋아했던 관객은 <비긴 어게인>이 그것의 답습 같다며 혹평했지만, 그 외 국내 350만 관객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너무나 좋아했다. <라라랜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힘들어하는 아티스트가 역경을 딛고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과 관계에 관한 고민도 많이 내포된 영화이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강점은 아담 리바인의 'Lost Stars'를 중심으로 한 트렌디한 영화 음악과 뉴욕의 멋스러운 분위기이다. 여름 뉴욕 도심 속에서 야외 녹음을 하는 컨셉 자체가 생각만 해도 자유롭게 느껴지고, 세션 장면뿐만 아니라 키이라 나이틀리와 마크 러팔로가 이어폰을 끼고 프랭크 시나트라 음악을 들으면서 뉴욕 밤거리를 걷는 장면은 음악 영화 명장면을 언급할 때 빠짐없이 등장할 장면이다.
멋스러운 분위기에 더하는 것은 출연진의 자연스러운 연기다. 키이라 나이틀리부터 유명 밴드 마룬파이브의 보컬 아담 리바인, 그리고 현재 영국의 쇼 호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제임스 코르덴까지 출연진이 굉장히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들 사이의 케미스트리가 굉장히 자연스럽다. 그 때문에 관객은 뉴욕 거리에서 라이브로 녹음한다는 거의 실현 불가능한 상황을 어느 정도 신뢰하면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출연진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핸드헬드 카메라 움직임과 잘 어우러져 존 카니 음악 영화 특유의 로우 파이(lo-fi)적인 느낌을 만들어낸다. <비긴 어게인>은 <라라랜드>만큼이나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국내에서는 존 카니가 더 크게 대중의 주목을 받는 계기가 되어 그의 차기작 <싱 스트리트>(2016)의 흥행으로도 이어졌다.
3. <라라랜드> 와 <비긴 어게인>의 비판의 이유- 예술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의 호평의 공통된 이유는 예술이 되었든 연애가 되었든 관객이 현실에서 겪는 혼돈에 나름의 체계적인 해답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명쾌한 해답은 아니지만 그런데도 세계에는 어떤 질서가 있다는 안도감을 이 영화들을 보고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이 비평계와 대중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지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는지를 논할 것이다. 그 이유는 두 작품에서 예술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적 봉쇄'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각 영화에서 예술의 생산, 수용, 그리고 작품 자체 세 측면에 관한 이데올로기가 그 외 인종 및 젠더 이데올로기와 함께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또 그것이 해결책으로 등장하게 된 기반이 된 유토피아적 욕망은 무엇인지, 즉 어떤 이유로 사람들이 호응을 했는지를 설명할 것이다.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을 비롯한 많은 음악, 예술 영화가 재생산하는 ‘자율적 예술’이라는 예술 이데올로기의 근원은 다음과 같다. 전근대 시기의 예술은 규칙에 입각한 생산으로 공동체적 규범의 형상화로 이해됐다. '무언가 특별한 것'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근대적 예술 개념은 근대 시민사회와 함께 성립되었다. 예술가는 자본주의화가 이루어지면서 후원제에서 분리된 후 그들의 위치가 격상되고 예술가의 독창성이 중시되면서 예술이 과학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보다 고차원적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다. 이로써 예술은 다른 분리된 사회 제도 중에서도 '무언가 특별한 것'이라는 위치를 획득하게 된다. 그 이후로 예술이 초월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인식은 그것이 여타 실천적 활동의 한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예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로서 존속되고 있다. 예술가의 예술 활동의 소외와 신비화는 딜러, 비평가, 저널, 출판사 등 그것을 둘러싼 전문화된 예술제도와 인력들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이데올로기를 반박할 대표적 근거로는 예술 생산이 사실은 집단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영화나 연극 같은 예술은 직접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생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예술 생산의 필수 전제 조건으로 예술가 이외의 상인, 비평가들이 예술 생산에 기여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예술가와 예술은 자율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닌 사회제도 혹은 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정해지고 재생산된다. 대표적으로 미술사에서 여성 예술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유는 예술가가 되기 위한 조건에 젠더가 있었기 때문이다. [6]
3-1. 예술 생산 이데올로기
1) <라라랜드>
<라라랜드>는 진정한 예술은 고독한 예술이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일지언정 결국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라라랜드>가 주장하는 ‘진정한’ 예술은 근대적 예술 생산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것이고, 두 주인공의 사랑 또한 젠더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관계이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먼저 극 중 등장하는 주인공 예술가는 자기 일을 혼자서만 한다. 재즈 피아니스트 세바스찬은 곡을 쓰거나 연주할 때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는다. 혼자서 곡의 한 부분을 반복해서 듣거나, 연주할 때는 주변부는 블랙아웃으로 페이드되고 세바스찬만 스포트라이트로 비친다. 한편 오디션 낙방을 거듭하던 미아가 스스로 창조한 기회도 자신이 직접 쓴 1인 연극이다. 미아가 준비하고 공연하는 과정에서 극장 관계자나 스탭과 접촉하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술은 궁극적으로 혼자 하는 것이라는 ‘고독한 예술가’ 이데올로기는 감독의 전작 <위플래쉬>에서도 나온다. 재즈 드러머가 주인공인 <위플래쉬>에서도, <라라랜드>에서도 세바스찬이 얘기하는 '서로 경쟁하고 합의점을 찾는' 재즈의 특성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위플래쉬>와 마찬가지로 <라라랜드>에서도 혼자 예술에 몰두하여 성취한다는 내러티브를 굉장히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것은 예술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노력 말고도 많은 제약이 있다는 현실을 간과한 내러티브이다. 한편, 이 내러티브가 한국의 예술 이데올로기와 일치하기 때문에 한국 관객이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에 호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슈퍼스타K’로 시작해 ‘프로듀스 101’과 ‘쇼미 더 머니’ 등으로 대표되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꿈’을 가진 청년들이 열심히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현실의 사회적 제약이 제거된 진공 상태의 스튜디오에서 열심히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경쟁 프로의 인기는 한국 사회에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재생산하고 있는 예술 이데올로기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나아가 <라라랜드>는 ‘진정한’ 예술은 고독한 예술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술가의 삶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몇 년 후 세바스찬을 대체한 미아의 남편은 아내의 커리어를 충실히 뒷받침하는 비예술가로 짐작되며, 결말의 클럽 장면에서 음악을 듣는 동안 스쳐 가는 상상 속의 세바스찬은 다분히 패밀리맨으로 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내가 내가 아니라면'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6086) 하지만 이 주장이 진실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에서 보여준 미아와 세바스찬의 사랑이 '진실한' 사랑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예술을 성취하기 위해 ‘진정한’ 사랑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랑이 그저 그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애를 중단하고 야망을 따른 것 같다. 특히 그들 관계에서 세바스찬의 여성 혐오에 기반한 권력 불균형이 너무 크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의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 권력 불균형은 영화 텍스트 안팎으로 보인다. 영화 텍스트 내부를 먼저 보자면 세바스찬은 미아의 예술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중반부에 세바스찬이 작곡한 노래 (City of Stars)의 가사에서 'All I need is this crazy feeling / A voice that says I'll be here / and you'll be alright'은 거짓말이다. 극 초반에 세바스찬의 누나가 여자를 소개해준다고 했을 때, ‘그녀가 재즈를 좋아하지 않으면 무엇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냐’고 할 정도로 재즈가 인생의 전부인 사람에게 사랑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세바스찬이 캐스팅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고향에 있는 미아를 찾아가는 장면에서 그가 미아와의 관계에 헌신적인 듯 하지만, 사실 그는 미아의 야망이 얼마나 큰 지 알 뿐이다. 세바스찬은 미아가 그의 재즈 음악을 이해하려 들인 노력만큼 미아의 연기나 영화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미아의 재즈 음악 이해마저도 세바스찬의 맨스플레인에 의해 진행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Morgan Leigh Davies, Art in the Age of Masculinist Hollywood: Damien Chazelle’s “La La Land”, LA Review of Books, 2017, https://lareviewofbooks.org/article/art-age-masculinist-hollywood-damien-chazelles-la-la-land/ 참고) 재즈를 싫어한다는 미아의 말에 세바스찬은 그녀를 재즈바까지 데려가 재즈에 관한 설명을 해주지만, 리알토 극장에 가서는 <이유 없는 반항>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초반은 미아가 스크린 앞을 가로막고 서고, 중반에는 두 사람이 영화를 배경으로 키스를 하려 하고 결국 필름이 타버려 상영이 중지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라라랜드>를 지지하는 이동진 평론가는 미아가 스크린 앞에 서서 프로젝터가 그녀의 몸에 비추는 장면을 보고 말 그대로 ‘영화가 그녀의 몸에 흐른다’고 해석했는데, 극장 매너를 고려해서도 장면 연출을 고려해서도 설득되지 않는 해석이다.-출처: 메가박스 씨네리플레이 2016) 텍스트 밖에서 영화 자체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아도 <라라랜드>는 미아보다 세바스찬의 예술세계를 훨씬 비중 있게 다룬다. 두 사람의 관계는 철저히 세바스찬의 연주에 의해 시작되고(Mia and Sebastian’s Theme) 종결된다(Epilogue). 관객에게는 미아가 오디션에서 낙방하는 모습을 몇 차례 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연기 세계를 알아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미아가 성공한 여배우가 됐을 때도, 관객은 그녀의 커리어와 관련해서는 그녀가 잉그리드 버그만 같은 포즈를 하고 벽화에 그려진 모습만 얼핏 볼 수 있고 그 외에는 그녀의 여유로운 가정생활만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세바스찬이 차린 재즈바에서는 그가 아끼는 재즈 거장이 앉은 의자 등 세세한 인테리어 디테일부터 그의 마지막 퍼포먼스까지 볼 수 있다. 재즈(=세바스찬)와 영화(=미아)라는 주제를 동시에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재즈가 왜 훌륭한지 설명은 부족하더라도 다소 직접적으로 세바스찬의 입을 통해 미아가 설명을 듣는 방식으로 제공되지만, 영화가 왜 훌륭한지는 관객은 끝까지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한다.
2) <비긴 어게인>
<비긴 어게인>은 <라라랜드>보다 예술 생산 이데올로기를 더 전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라라랜드>가 ‘진정한’ 예술을 고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비긴 어게인>에서 말하는 ‘진정한’ 예술은 작가(auteur)가 ‘영감’을 받아서 만든 ‘비상업적’ 예술이다. <라라랜드>에서 과거의 예술을 맹신적으로 떠받는 주인공들과는 달리 <비긴 어게인>은 싱어송라이터라는 작가주의적 성향을 가진 예술가를 주인공으로 한다. 그레타는 음악을 듣고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눈치채는 음악적 직관이 있고, 이별의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아티스트’이다. 그레타와 같이 음악 작업을 하는 프로듀서 댄 또한 오늘날 나오는 틴에이저 아이돌의 음악에 염증이 난 사람으로 그레타와 비슷한 음악적 세계관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초반에 그레타가 나이브하게 ‘음악은 듣는 이를 위한 것’이라며 ‘이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때 댄이 코웃음 치며 ‘당신이 존경하는 밥 딜런 같은 사람도 십 년마다 이미지를 바꿨다’며 그녀가 가진 ‘순수 뮤지션’ 이데올로기를 깨뜨린다. 하지만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영화는 오히려 그레타의 나이브한 ‘순수 뮤지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쪽으로 흘러간다. 그레타와 댄과 함께 세션에 참여하는 이들도 돈보다는 음악 제작 자체에 열정이 있는 사람들이고, 대학교에서 비발디 연주만 하거나 발레 학원에서 반주만 하는 일상에 지친 연주자들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은 상업적인 것과 거리가 먼 것이다. 이들은 더욱 ‘진정성’ 있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야외 라이브 녹음을 한다. 훌륭한 예술은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 반대는 늘 성립하지 않는다) 그들의 시도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들의 말한 의도와 관객이 듣는 결과물은 상응하지 않는다. 영화 속 음악에는 자동차 경적이 소리나 바람 소리가 이따금 들리긴 하지만, 야외에서 라이브로 녹음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클린한 사운드의 음악이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레타와 댄의 라이브 음악과 대립을 이루는 것은 그레타의 전 남자친구 데이브가 만든 스튜디오 앨범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데이브가 ‘Lost Stars’를 부르며 관중과 호흡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레타가 미소를 짓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상업 음악을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다고 얘기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두 주인공에게 직간접적으로 시련을 주는 원인이 모두 레코드 레이블에 있고 (댄-레코드 레이블 사장, 그레타-레코드 레이블 매니저), 그레타가 레코드 레이블의 수익구조에 의문을 제기하고, 엔드 크레딧에서 앨범을 1달러에 인터넷 상에서 판다는 점에서 ‘진정한’ 예술은 비상업적 예술이라고 여기는 영화의 태도가 강력하게 드러난다. 일단 예술이 순수하기 위해선 비상업적이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근대 예술 이데올로기로, 절대 예술의 본질적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현재 음악 산업에는 그레타가 말한 문제와 같은 형평성 문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 문제의식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 문제의식이 영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탐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라랜드>와 마찬가지로 <비긴 어게인>에서 진정한 예술은 비상업적이므로 현재 음악산업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설명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명된 것처럼 제시된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상업 예술이 뮤지션들에게 어떤 착취를 가하는지도 자세히 묘사되지 않는다. 학생으로 보이는 그레타도 맥북과 아이팟, 아이폰 정도는 갖추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금전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레타의 친구 또한 성공적인 뮤지션은 아니지만, 상업 예술이 그를 어떻게 소외시키고 있는지 제대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레타가 주장하는 음악의 진정성은 앨범을 1달러에 주고 인터넷으로 팔자고 주장할 때 ‘우리가 만든 음악인데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는 식의 대사 한마디로 제시될 뿐이다. <라라랜드>가 과거의 예술을 칭송할 때 현재의 예술을 폄하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긴 어게인> 또한 별 다른 설명 없이 ‘비상업적’ 예술을 진정한 예술로 정의하는 과정에서 선악 구도 설정을 통해 ‘상업적’ 예술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그레타와 댄이 제작한 노래도 극 중에서는 깔끔하게 프로듀싱된 음악이기 때문에 상업 예술에 속한 아티스트 데이브가 부르는 노래와 비교했을 때 별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관객은 상업 음악을 그레타와 댄의 음악보다 열등한 것으로 평가할 이유가 없다.
3-2. 예술 수용 이데올로기
1) <라라랜드>
<라라랜드>의 두 주인공 모두 각 장르의 현대보다 과거의 것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미아는 이모와 집 근처에 있는 도서관에서 옛날 영화를 보면서 배우를 꿈꿨다고 말하고, 세바스찬은 과거의 재즈 아티스트를 신격화하고 정통 재즈를 수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임을 밝힌다. 특히 세바스찬의 전통주의 관점은 감독이 실제로 재즈 드러머를 꿈꿨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감독의 것과 일치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라라랜드>에는 과거의 예술을 수호하는 것을 넘어 컨템포러리 장르로 넘어가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퍼져있다. 이 태도는 모더니즘 조류 중 하나인 댄디즘으로 설명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압도하고 수평화시키는 민주주의의 상승 조류에 대한 도전으로 등장한 댄디즘은 자기 숭배, 인격의 귀족적 우월성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다 살 수 있게 된 자본주의의 천박함에 대항한 일종의 거부반응이다.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이 ‘힙스터’로 정의되곤 한다. 하지만 이 개념이 처음 등장한 19세기에도 이미 밝혀졌듯이, 댄디즘을 비롯한 인상주의, 유미주의 조류는 부르주아 기존 질서에 대한 소극적, 회피적 저항이라는 한계점을 갖는다. 중산계급의 가치를 거부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실질적으로는 신흥중산계급의 더 리버럴한 취미를 대변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7] 따라서 미아가 오디션에서 노래하며 자처하는 것처럼 이들을 ‘혁명가’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 내에서 왜 옛날 재즈, 옛날 영화가 위대한지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과거의 훌륭한 예술의 훌륭한 지점은 당대 인식의 지평을 깼다는 결과가 아니라 그 결과를 낳은 주인공들의 느낌, 생각, 행위 및 그것들의 절묘한 서사이거나 그 결과를 낳은 원인으로서의 작품 자체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훌륭한 예술이 오늘날에도 훌륭하다고 설득하려면 그 과정을 오늘날의 수용자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8] <라라랜드>는 <카사블랑카>(1942), <사랑은 비를 타고>(1952) 등 할리우드 전성기의 수많은 뮤지컬 영화들에 오마주를 표하고 있지만, 그 장면에서 얻는 감동은 오직 그 레퍼런스를 이미 알고 체화한 관객들을 위한 것이다. 오마주를 통해 영화의 중요한 클라이맥스 장면을 많이 만들었다면 옛날 영화가 사람들의 감동을 자아낸 방식을 차용했어야 했는데, <라라랜드>는 과거 영화의 제스처, 소품, 백그라운드를 따라 하는 것에 그친다. 그렇기 때문에 옛 예술의 텍스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만한 감동도 느끼지 못하며,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위대한 예술이구나’ 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오마주이기 때문에 내재적 한계가 있다는 반박은 성립하지 않는다. 스파게티 웨스턴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누벨바그 시네마에는 노아 바움백의 <프란시스 하> 등 오마주로 이뤄진 많은 영화는 관객이 원 텍스트를 알지 못해도 위대한 예술을 볼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고, 동시에 원작의 위대함이 어떤 것인지도 충분히 설명된다.
https://www.youtube.com/watch?v=iI5BPRrj554 La La Land - Movie References
<라라랜드>가 극 중 영화보다 더 큰 실례를 범하고 있는 것은 재즈이다. 세바스찬의 재즈 순수주의를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재즈 네오밥(neo-bop) 스쿨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네오밥 스쿨은 재즈가 힙합, 록에 편입되기를 거부한 80년대에 대두한 흐름을 가리킨다. 하지만 세바스찬이 숭배하는 마일스 데이비스는 네오밥 흐름을 거부한 것으로 유명하며, 그가 재즈 록 앨범을 만들었을 때 신념을 저버렸다고(sell out) 많은 이들의 비난을 샀다. [9] 극 중 재즈는 그나마 영화보다는 묘사가 잘 되고 있지만, 여전히 왜 네오밥 스쿨의 재즈가 컴퓨터 사운드가 가미된 컨템포러리 재즈보다 더 훌륭한 것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설명을 디지털 음악을 가미한 컨템포러리 재즈를 비하하는 데에서 찾으려고 하는 듯하다. 하지만 영화에서 키이스의 상업 밴드가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현대 재즈는 재즈 문외한이 봐도 형편없는 수준이다. 그것은 굳이 컨템포러리 재즈가 수준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재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스(synth) 사운드가 가미된 훌륭한 컨템포러리 재즈 피스를 하나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라라랜드>가 재즈를 잘 모르는 일반 대중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은 이와 같은 이유로 걱정된다. 현실에서 많은 컨템포러리 재즈 아티스트가 ‘재즈를 살리기 위해’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하고 좋은 음악을 만들고 있는데, <라라랜드>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좋은 재즈는 ‘순수한’ 과거의 재즈라는 선입견이 대중에게 삽시간에 퍼지게 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백인인 세바스찬이 흑인 문화로 시작된 재즈를 수호하겠다는 태도 또한 미심쩍다. (이와 관련해서는 Seve Chambers, “La La Land Is Clueless About What’s Actually Happening in Jazz”, Vulture, https://www.vulture.com/2017/01/what-la-la-land-gets-wrong-about-todays-jazz.html 참고) 그렇다고 해서 <라라랜드>가 인종차별적인 영화는 아니지만, 현실을 성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영화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혹자는 이런 과거 예술을 향한 노스탤지어가 과거 백인 업적에 크게 기댄 2016년 트럼프 정치 캠페인의 영향이라고도 평가했다. [10]
2) 비긴 어게인
<비긴 어게인>에서 예술 수용 이데올로기는 ‘구원으로서 음악’ 혹은 ‘음악의 치유력’의 형태로 나타난다. <비긴 어게인>의 원제는 ‘음악이 당신의 삶을 구원할 수 있나요? Can a Song Save Your Life?’이었다. [11] 즉, ‘음악의 진정성’과 함께 이 영화의 또 다른 큰 주제는 ‘음악의 치유력’이다. 그레타는 이별의 고통을 ‘진정한’ 음악을 만듦으로써 극복하고, 댄은 ‘진정한’ 앨범을 프로듀싱하여 회사와 가족의 인정을 되찾는다. 그레타의 문제는 남자친구와의 이별로 잃었던 자존감을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함으로써 되찾으면서 해결될 수 있다고 쳐도, 댄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댄의 알코올 중독 같은 심각한 문제는 고사하고, 댄의 딸 바이올렛(헤일리 스타인펠드) 문제같이 사회의 젠더 이데올로기로 생긴 문제를 개인의 자존감 해결 문제로 봉쇄된다. 14살 바이올렛은 같은 학교 남학생의 시선을 끌고 싶다는 이유로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다닌다. 걱정이 되긴 하지만 손 쓸 바를 모르던 댄을 그레타가 돕는다. 그레타는 바이올렛에게 ‘너무 쉽게 보이면 안 된다’며 노출이 덜 심한 옷을 입길 권한다. 바이올렛은 그레타의 충고에 귀 기울이고, 그레타의 앨범에 기타로 참여하면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모습을 보인다. 십 대 여성의 옷차림에 관련해서 많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지만, 그 논의 자체가 내재적으로 여성 혐오적일 뿐만 아니라 극 중 설정이 여름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바이올렛이 입고 나온 옷이 그렇게 노출이 심한 것도 아니다. 음악을 통해 그레타와 댄의 플라토닉한 우정이 굳어지는 것은 확인할 수 있어도, 그 음악이 댄의 가정 문제까지 말끔하게 해결하는 전개는 다소 성급한 부분이 있다. 한편, 음악이라는 신비한 힘을 가진 무엇으로 연애와 가정 문제가 해결되는 내러티브에 허점은 있지만, 여기에 호응한 관객의 연대를 향한 유토피아적 욕망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비긴 어게인>이 <라라랜드>와 공통적으로 갖는 특이점은 남녀 주인공이 통상 로맨스 영화와는 달리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대신 그들의 꿈을 이루는 식으로 끝나는 것이다. 사랑을 이루는 것보다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꿈을 이루는 것이 더 힘든 한국 사회의 유토피아적 욕망이 두 영화의 엔딩과 일치하여 호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3-3. 예술 작품 자체의 이데올로기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제를 배반하는 형식이다. 형식 비평의 가능성은 자넷 월프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자넷 월프는 ‘자율적 예술의 이데올로기’의 결론 부분에서 다양한 형식의 예술이 텍스트 분석이 아닌 예술의 형식적 특성 및 예술의 생산을 장려하는 제도 분석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단지 텍스트 분석만으로는 재현적 예술 또한 불충분하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고 밝힌다. [12]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 모두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어진 상업영화이다. 출연진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 한 번쯤은 출연한 A 리스트 배우들이다. 특히 <비긴 어게인>의 경우 비상업적 예술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아담 리바인[13], 씰로 그린, 헤일리 스타인펠드 등 이미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뮤지션들이 출연한다. 특히 키이라 나이틀리 같은 세계적 배우가 음악 산업에 문제를 제기를 하는 장면은 마치 현대카드 자본이 인디 음악계를 장악하고 있는 모습과 CJ 자본이 CGV 아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떠오르게 한다. 대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에 ‘진정한’ 예술을 논할 때도에도 한계가 있다. 아카데미에서 주목한 감독이 만든 <라라랜드>는 과거 아카데미에서 주목했던 영화들을 오마주하여 연말연시 시상식을 휩쓸었고, 많은 상업 뮤지션들이 등장한 <비긴 어게인>은 음악 산업의 착취 문제를 제대로 직시할 용기를 잃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의 몇 분에만 할애된다.
이런 부류의 대중영화는 고차원의 예술에 노출될 기회가 잦지 않은 대중에게 의사(擬似)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무의미하진 않지만, 그것이 마치 ‘진정한’ 것처럼 포장한다는 점에서 유해하다. 요컨대 영화 자체가 일반 대중을 기만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물론 씨네필들이나 예술 애호가들의 경우 그 차이를 분간을 할 수 있고 대중영화를 향유하더라도 그것이 전부라는 착각에서 피해 갈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은 명망 높은 평론가들(정성일, 허문영, 남다은 등)이 그 논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는 점, 혹은 평론가가 논의에 참여할 의향이 있더라도 자유로운 논의가 진행될 기반이 부재하다는 문제(씨네21의 경우 상업 잡지의 성격이 강하다)가 있다. 일반 대중이 위 영화를 보고 진정한 씨네필로 입문하여 그들의 취향이 발전한다면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상업 영화 산업이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라라랜드>의 경우 굿즈 판매나 콘서트 티켓 판매를 통해 소비주의를 조장하는 등 취향의 발전보다는 관객이 한 영화에 갇혀있게끔 한다.(2015년~2016년 이후로 자주 있는 현상으로 <라라랜드>만의 문제는 아니다.) 실상은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여 현실 직시를 어렵게 하는 상업 영화에 불과하지만, 여타 액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대항하는 예술영화의 탈을 쓰고 대중이 그 이상을 탐구하는 것을 불가하게 한다.
4. 결론
한국에서 유난히 인기 많은 장르인 음악 영화 중, 최근 가장 인기가 많았던 두 음악 영화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의 예술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분석해보았다. <라라랜드>는 ‘진정한’ 예술은 고독한 예술이라는 예술 생산 이데올로기와 ‘좋은’ 예술은 과거의 예술이라는 예술 수용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이것이 한국 관객의 예술 이데올로기에 상응하기 때문에 같은 감독의 <위플래쉬>에 이은 <라라랜드> 또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비긴 어게인>은 ‘진정한’ 예술이란 ‘영감’으로 만들어지는 ‘비상업적’ 예술이라는 예술 생산 이데올로기와 예술은 ‘구원’의 기능을 한다는 예술 수용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 같은 상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인디’스러운 마케팅 방식을 취해 여타 블록버스터의 대항 이데올로기를 자처한다. 대중에게 상대적으로 고차원의 예술을 언뜻 볼 수 있게 해주긴 하지만, 상업 영화 산업 구조가 대중에게으로 하여금 그 이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유해하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제임슨의 비평 방식을 따라 <라라랜드>와 <비긴 어게인>에서 한국 관객의 유토피아적 욕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영화 모두 로맨스 영화 장르 법칙을 따르고 있지만, 커플이 맺어지지 않는 대신 주인공이 꿈을 이루는 결말은 사랑보다 꿈을 이루기 힘든 한국 사회의 유토피아적 욕망을 내포하고 있다.
[1] 영상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2018년12월23일접속
[2] 정구원, “대한민국을 흔든 역대 음악영화 흥행 TOP 10”, 카카오뮤직, 2018, 2018년12월23일접속 https://1boon.kakao.com/music/music_movie
[3] 정성철, 이데올로기
[4] 프레드릭 제임슨, 정성철 역,「대중문화에서의 물화와 유토피아」, 1992, p.18
[5] Noah Gittell, “The La La Land backlash: why have critics turned on the Oscar favorite?”, The Guardian, 2017, 2018년12월 23일 접속 https://www.theguardian.com/film/2017/feb/06/la-la-land-criticism-race-gender-jazz-awards
[6] 정성철, 예술생산의 사회적 성격, pp. 1~6
[7] 정성철, 모더니즘 발생조건과 양상, p.4
[8] 정성철, 비평의 세 계기, p.14
[9] Seve Chambers, “La La Land Is Clueless About What’s Actually Happening in Jazz”, Vulture, 2017, 2018년12월23일접속 https://www.vulture.com/2017/01/what-la-la-land-gets-wrong-about-todays-jazz.html
[10] Noah Gittell, “The La La Land backlash: why have critics turned on the Oscar favorite?”, The Guardian, 2017, 2018년12월 23일 접속 https://www.theguardian.com/film/2017/feb/06/la-la-land-criticism-race-gender-jazz-awards
[11] Susan Wloszczyna, Begin Again Review, Roger Ebert, 2014, 2018년12월23일접속 https://www.rogerebert.com/reviews/begin-again-2014
[12] 자넷 월프, 『자율적 예술의 이데올로기』, 1987
[13] 아담 리바인은 <비긴 어게인>에 무보수로 참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