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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May 24. 2018

빛을 보는 남성 판타지, 그렇지 못하는 여성 판타지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2014)을 보고

*아래 글은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의 메이저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드림 픽시 걸 이라는 말이 있다. AV Club의 전 편집장 네이선 라빈이 커스틴 던스트와 올란도 블룸 주연의 <엘리자베스타운>(2005) 비평(https://film.avclub.com/the-bataan-death-march-of-whimsy-case-file-1-elizabet-1798210595)에서 처음 쓴 단어로, 남성 캐릭터의 성장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여자 캐릭터를 일컬는 말이다. 더 정확히는 '매닉 픽시 드림 걸'로, 이 말이 어떤 캐릭터를 일컬는 말인지를 설명하면서 그는 영화 <가든 스테이트>(2004)의 나탈리 포트만 캐릭터를 예시로 든다. 네이선 라빈은 당시 이런 류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너무 많아서 이들을 지칭할 용어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매닉 픽시 드림 걸들의 특징은 남자의 판타지를 반영한 외모와 성격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들의 특징은 주류 남성들의 마초적 판타지와는 사뭇 다른 것으로, ‘다른 여자들과는 다른’ 약간 특이한 매력과 99퍼센트의 확률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찌질한 남자가 동경할 수 있는, 혹은 그 남성들을 보듬어줄 수 있는 성격 정도가 되겠다. 그런 성격을 갖고 있는 이 여자들이 비주류적으로 섹시하고, 남자 주인공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낀다는 점이 가장 큰 판타지이다. 또 하나 중요한 특징은 그녀들은 남자 주인공들과는 달리 직업이 없거나 딱히 뭐라 할 꿈이 없다는 것이다. 직업이 언급이 되어도 정확히 명시되지 않거나 그것을 하는 모습이 보여지지 않는다. 이들은 남성 캐릭터의 성장을 위해 존재한다. 주로 남성 감독들의 영화 속 2차원적 여성 인물들이 이 타입에 속하며, 이 용어가 생긴 뒤로부터 남성이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편이다.


<가든 스테이트>의 나탈리 포트만, <500일의 썸머>의 주이 디샤넬

  

  최근에 들어서는 이 용어의 필요성 내지 유효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매닉 픽시 드림 걸 이라는 말이 조금 특이하다 싶은 여성을 폄하하기 위해 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성 작가들의 뒤틀린 시선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가 그 뒤틀린 시선을 재생산하고 있다. 캐릭터가 아닌 실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여성의 외모나 외적인 특징을 보고 약간 특이하고 'adorkable'(adorable+dorky)하다고 판단되면 그녀를 매닉 픽시 드림 걸 지칭하고 2차원적 캐릭터로 치부해버린다. 아래 텀블러 포스트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이제부터 여자가 "매닉 픽시 드림 걸" 스테리오타입에 속한다고 해서 놀리지 말 것. 여자애가 좀 특이하고 머리 염색하고 달 사진 찍으면 좀 냅둬라. 걔네가 밀크셰이크랑 꽃 타투 좋아한다고 해서 남자들이 지네들 자존문제까지 해결해 줄거라고 생각하는게 걔네 탓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닉 픽시 드림 걸'은 단어의 쓰임과 이해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지, 비평에 있어서는 유효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단어를 처음 만든 네이선 라빈의 문제의식은 아직까지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아직도 남성 작가들의 여성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나무 판자만큼이나 평평한 캐릭터들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컨텐츠의 발전을 위한 비평에 있어서 필요한 단어라고 판단하여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을 '매닉 픽시 드림 걸' 클리셰를 통해 분석해보려고 한다.

(왼쪽부터) 사와베 츠바키, 미야조노 카오리, 아리마 코세이, 와타리 료타

  <4월은 너의 거짓말>의 카오리는 드림 픽시 걸에 속하는가? 첫번째 특징에는 무리없이 들어맞는다. 치렁치렁한 금발의 소유자이고 짧은 치마를 입고 등장하지만 거유가 돋보이거나 하지 않고 와이셔츠를 꺼내 입고 넥타이를 대충 맨 모습으로 자주 나온다. 첫인상이 최악이고 말보다 손이 먼저 나가는 여자라고 누누이 묘사되지만 결국 병약한 가련 캐릭터이다. 결정적으로 음악의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아리마와 유일하게 음악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여성이다. 츠바키와는 달리. 덧붙여 실사 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극중 미의 기준과 현실, 즉 우리의 미의 기준은 다르기 때문에 극중 미소녀/이케멘이 누구인지 눈여겨 볼만 하다. 우리에게는 전부 뽀샤시한 애니 캐릭터들이지만 극중에서는 카오리와 와타리가 미소녀와 이케멘에 속한다. 반면 아리마는 안경낀 소심한 남자아이로 묘사된다.

애니메이션 설정화
작중 초반 카오리

  다만 두번째 특징으로 카오리를 드림 픽시 걸로 지칭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녀의 바이올린 실력을 공들여 묘사하기 때문이다. 바이올린을 향한 끈기나 열정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와 기술을 표현하는 데 초반 에피소드의 대부분이 소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은 너의 거짓말>은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아름답고 재능있는 여자아이가 트라우마가 있는 남자아이에게 무언가를 알려준다. 남자아이는 그로 인해 성장하고 여자아이는 죽어버린다. 이게 형편 없이 묘사되었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아리마가 딛는 성장의 과정은 굉장히 섬세히 묘사되었으며 그 성장은 굉장히 중요한 것으로 애니메이션을 다 보고서도 우리 현실의 것으로 가져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시리즈 초반에 카오리의 연주는 2번 등장한다.

  불편한 점은 다음이다. 같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과 드림 픽시 역할을 하는 캐릭터의 젠더가 바뀌면, 즉 드림 픽시 보이가 여자 주인공의 인생을 바꾸고 죽어버리는/사라지는 내러티브를 갖는 작품은 주로 폄하된다. 4월은 너의 거짓말은 드림 픽시 걸을 남용한 작품으로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섬세했고 하고자 하는 바에 집중했기 때문에 여기에 딱히 비교할 만한 대상이 지금으로서는 없다. 아쉬운대로 드라마 도깨비, 별그대 (둘 다 여자 남자 주인공이 결국에는 이어지지만, 중간에 여자를 위해서 남자가 사라진다) 혹은 시대를 풍미한 귀여니의 인터넷 소설 신드롬(스포일러: 여자 주인공 성장, 남자 주인공 사망)을 보자. 여자들은 한때 열광했고 나머지 세상은 작품과 열광하는 여자들을 비웃었다. 그건 위 작품들이 ‘탄탄하지’ 못해서도 맞지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열광을 했으면 같은 소재를 갖고 ‘탄탄하게’ 발전시킬 때도 되지 않았나? 그 결과가 반대에서는, 그러니까 드림 픽시 걸 소재로는 <4월은 너의 거짓말>과 영화 <500일의 썸머>로 나타났고 폄하는 커녕 찬사를 받고 있다. 즉, 여자의 판타지는 남자의 판타지와는 달리, 소재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카오리 바이올린 연주회의 피아노 반주를 해주고 트라우마를 딛고 피아니스트로서 부활하는 아리마. 이 연주회 이후로는 카오리의 연주는 나오지 않는다.

  <4월은 너의 거짓말>은 좋은 작품 축에 속하지만 이런 점들이 떠올라 완벽하게 몰입하여 즐길 수 없었다. 더 우울한 점은 이런 논의가 현재 재패니메이션 계에서 얼마나 유효한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속에서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감수성은 끔찍할만큼이나 적다.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 않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면 즐기지 못하기 때문에 평소에 갖는 사람들도 잠시 그 스위치를 꺼야한다. 그래야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 스위치를 언제까지나 꺼놓을 수는 없다. 언젠가는 불편해서 떠날 수 밖에 없다. 재패니메이션의 고인물 문제가 단지 여성 인권 감수성 미달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문제가 조금이나마 조명되면 필히 더 다양한 소재의 애니메이션이 등장할 것이다. 무궁무진한 발전이 보이는 장르인데, 이 문제가 조금도 해결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 떠나가는 관중들을 붙잡지 못하는 현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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