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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Jan 14. 2019

성소수자들이 선택하는 신화로서 퀴어 영화 (1)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과 <아가씨>(2016)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1) 개봉 당시 반응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2016)는 개봉 당시에 많은 이들의 지적을 받았다. 주인공이 레즈비언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성 정체성이 깊이 탐구되지 않았다는 점, 남성 판타지 혹은 남성 시선(male gaze)이 담긴 레즈비언 섹스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퀴어 소재를 흥행 목적으로 남용했다는 의견이 주된 논점이었다. 국내에서는 올해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이하 <콜바넴>)도 비슷한 비판을 받았다. 아름다운 두 남성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동성애적 관계가 깊이 있게 묘사되지 않았고, 게이 섹스 장면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점에서 퀴어 관객보다는 이성애자 여성 관객에게 어필하는 '멸균된 게이 영화’라고 비판 받았다. [1]  두 영화에 대한 비판의 공통 논점은 영화 속 묘사된 성소수자의 사랑이 판타지라고 해도 될 만큼 비현실적으로 쉬웠다는 것이다. 두 감독은 이 비판에 대해 변명하려 하지는 않았다. 박찬욱은 "아가씨는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맞서 싸우는 퀴어 영화는 아니"라며 "우리 사랑을 인정해주세요 가 아니라 당연한 건데 뭐가? 왜? 하는 식으로, 굳이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노멀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 핵심이었다"라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2] 루카 구아다니노는 이 영화가 “여름의 이상 summer ideal”이며 주인공 개인의 여정보다는 "가족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3] 두 영화를 둘러싼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가씨>와 <콜바넴> 둘 다 흥행에 성공한다. <아가씨>는 전국 1171개의 스크린에 공개하여 약 428만 관객을, <콜바넴>은 전국 192개의 스크린에 공개하여 약 20만 관객을 동원했다. [4] 상업적 흥행에 성공한 동시에, 두 영화는 LGBT 커뮤니티에서도 큰 호응을 얻는다. 그 호응은 개봉 당시뿐만 아니라 극장에서 영화가 내린 뒤에도 계속되었다. <아가씨>는 2016년 여름에 개봉하여 그 후년에 ‘씨네리플레이’에서 상영됐을 때에도 표가 매진이 되었고, 올해 봄에 개봉한 <콜바넴>은 가을이 될 때까지도 팬덤이 활발한 활동 중에 있다. (*위 글은 2018년 가을에 작성했다. <콜바넴> 역시 2018년 연말 '씨네리플레이'에서 재상영 됐을 때 매진을 기록했다.) 두 영화가 LGBT 커뮤니티에서 유달리 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성소수자들 사이에서 두 영화가 신화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2) 신화 속 지워지는 동성애

신화는 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이다. 신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작품으로, 이야기의 참 거짓의 여부를 떠나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초자연적 존재의 이야기라고 해서 아무 이야기나 신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발견한 사람들에게 신성시되고 공유되는 이야기가 신화이다. 신화는 기억되기 때문에 현재 속에서 계속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5]  따라서 현실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신화는 존재근거의 흔들림, 삶의 무의미화, 자아를 설명할 수 없는 자기상실의 계기에서 요청되고 또 음송되는 필연으로서 그때 들려지는 진실한 이야기인 것이다. [6] 즉, 자기 정체성의 위기가 왔을 때 사람들은 신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또, 신화는 과거로부터 반복되고 축적된 이야기로서 그 집단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이데올로기로서 집단을 유지한다. [7] 그렇다면 특정 집단에 신화가 없을 때의 경우 또한 상상할 수 있다. 신화가 없는 집단은 그들의 정체성과 역사가 정당화되지 않고,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존재적 위기가 왔을 때 근원적인 해답을 얻을 곳이 없다. 성소수자들은 이런 집단에 속한다. 그들은 역사적으로 오랜 억압과 차별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는 주류사회의 역사에서 왜곡되고 삭제된다. 특히 종교집단에 의하여 현재까지도 교리적, 정치적 차별을 당하고 있다. 보수 종교단체에서는 성서를 근거로 하여 성소수자들의 존재 자체를 비윤리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성서의 오독에 기반한 것에 불가하다. 이런 주장의 대표적 근거로는 소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신학자 헬미니악에 의하면 구약성서에 나오는 소돔 이야기의 핵심은 동성애 섹스 자체가 아니라 비열함과 냉혹함 잔인함 학대였으며 그것이 심판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8]  또 다른 대표적인 주장은 그리스도가 율법에 기반하여 동성애를 비윤리적인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일부였을 뿐, 예수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과 율법의 요구사항을 지키는 것을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성소수자들의 역사는 성서 오독에 의해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삭제되기도 하였다. 성서학자 제닝스에 의하면 요한복음은 개인적 세부내용을 상세히 묘사함으로써 예수와 사랑받는 제자가 연인들이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9]  하지만 다른 복음서들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빼버렸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가 율법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여 예수의 사형이 정당화되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누가복음에서는 교의에 대한 변증이라는 과제를 단순화하기 위해, 마가복음은 순교 신학에 집중하기 위해 예수와 제자의 동성애적 관계를 역사에서 제거했다. [10] 요컨대 원활한 신도 모집을 위해 예수와 제자의 동성애적 관계가 나타난 신화를 종교로 편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소수자들의 역사는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에 권위가 부여되지 않았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교회 밖에서도 이어진다. 국내 개신교에서는 사회 일반에 동성애를 윤리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으며, 성소수자의 시민적 권리 역시 지지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사회에도 역시 교육이나 여타 법적 제도적 측면에서 이성애 관계나 가족이 ‘정상’으로 여겨지고 동성애자, 트렌스젠더 등을 터부시하는 문화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성소수자에 대해 개신교와 비슷한 태도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11]


이런 경위로 성소수자들에게는 그들의 근원을 설명해주고, 정체성의 위기를 느낄 때 의지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신화가 없다. 그래서 LGBT 커뮤니티는 계속해서 대중 미디어에서 퀴어 대표자 (queer representation)를 찾으려 노력한다. 대중서사장르가 '현대의 신화'로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관객의 기대와 능력이 장르 형성을 이끄는 주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인데 [12], 기존의 신화가 없는 성소수자들은 대중문화에서 그들의 신화를 찾으려는 욕망이 다른 집단보다 훨씬 더 간절하다. 하지만 대다수 미디어에 등장하는 성소수자 캐릭터들은 아이러니, 농담의 펀치 라인으로 쓰이거나 퀴어 소비자들을 의식한 퀴어 베이팅(queer baiting)용 인물로 등장한다. 그래서 게이/레즈비언 캐릭터의 사랑을 전적으로 축복하는 두 영화 <콜바넴>과 <아가씨>가 나왔을 때 성소수자들의 호응이 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아이코닉했던 LGBT 캐릭터들은 많았지만, 인물뿐 아니라 스토리까지도 신화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대중미디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영화가 퀴어 관객에게 신화로 여겨지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두 영화에서는 실제 퀴어 관객이 하지 못 하는 일들이 일어난다. 다시 말해서 퀴어 판타지를 담고 있는 영화이다. 여기서 두 영화의 배경이나 인물, 전개방식 등은 신화와 닮아있다. 둘째, 두 영화에서는 동성애 관계에서 이룬 사랑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한다. <콜바넴>에서는 두 남성이 이룬 사랑이 '초월'이고, <아가씨>에서는 두 여성이 이룬 사랑이 '구원'이다.



2.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


1) 신화적 요소- 성서

오프닝 크레딧 이후에 등장하는 '북부 이탈리아 어딘가'라는 텍스트로 영화는 시작한다.
성서 레퍼런스 : 과수원의 복숭아

<콜바넴>의 퀴어 판타지는 동성애자 인물이 낙원과 같은 공간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콜바넴>의 시작은 신화의 시작과 비슷하다. 신화는 보통 옛날 옛날에 라고 하는 서두로 시작한다. 이것은 신화가 '태초'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인데, 동시에 이야기의 신비성을 나타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리고 신화의 주역들은 초자연적 존재들이다. 이 신비성은 신화가 갖는 권위의 원천이다. [13] <콜바넴> 의 시작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느낌, 신비성을 띤다. 영화는 타이틀 카드가 나온 후 '1983년 여름, 북부 이탈리아 어딘가'라는 텍스트로 시작된다. 관객은 모르는 어딘가에 위치한 빌라 안에 거주하는 인물들은 비범한 사람들이다. 특히 주인공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평범한 십대 남자아이가 아니다. 학자 부부 아래에서 자란 3개 국어가 유창한 코스모폴리탄이고, 취미로 독서와 음악 편곡을 하는 교양이 풍부한 천재로 그려진다. 그가 사는 빌라 또한 일상적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미국 출신의 엘리오의 가족이 여름과 겨울을 보내기 위해 오는 휴양지이다. 이 빌라에 들어오기 위해서는 엘리오와 그의 가족처럼 교양과 지식을 갖춰야만 한다. 그 자격을 갖춰 이 가족의 휴양지에 입장한 인물이 올리버(아미 해머)이다. 이름 모를 이탈리아 마을에 위치한 빌라 옆에는 과수원이 딸려 있고, 뜨거운 이탈리아의 햇볕이 수영장과 뒤뜰을 적신다. 엘리오 가족이 살고 있는 이 집은 성서의 에덴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성서의 에덴과는 달리 이 낙원에서는 과일은 금기사항이 아니다. 엘리오의 섹슈얼리티는 과수원의 복숭아로 형상화된다. 올리버와 엘리오의 아버지 펄만 교수(마이클 스털버그)의 대화에 따르면 복숭아(apricot)의 어원은 라틴어 praecoquere로 '일찍 익다 early ripe' 혹은 '조숙한 precocious'로 해석된다. 이는 엘리오가 신동(prodigy)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하고 엘리오에게 일찍, 곧 다가올 성적 경험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어원은 '성장' 또한 함의한다. 엘리오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발견하고 탐구할 때 (이것은 엘리오가 복숭아로 자위하는 장면으로 상징된다) 낙원의 주인인 엘리오의 부모님은 그를 추방하지 않고 격려한다. 성서 레퍼런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이 끝나고, 엘리오가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며 모닥불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이때 스푸얀 스티븐스의 노래 ‘기드온의 예지력 Visions of Gideon’이 흐른다. 영화 속 음악은 엘리오의 마음속에 흐르는 음악이자 그의 목소리이다. [14] 기드온은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신으로부터 예지력을 얻고 전쟁에 임한 영웅이다. 여기서 엘리오는 기드온이다. 엘리오가 유대인이라는 사실 또한 기드온과 그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엘리오가 얻는 예지력은 그와 올리버가 여름에 나눈 사랑의 기억이다. 그 기억을 갖고 엘리오는 슬픔을 무릅쓰고 앞으로도 사랑하며 살아갈 것이다. 이 예지력은 엘리오 직접 얻은 것은 아니다. 기드온처럼 그의 예지력 또한 에덴의 신, 아버지에게 부여받은 것이다. 엘리오가 올리버와 헤어지고 귀환하자, 아버지는 다음 같이 말한다. "… 지금은 슬픔과 아픔이 있어. 그걸 없애지 마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말이야." 이렇게 영화는 성서 레퍼런스를 사용하여 영화 내용에 신성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태초'와 '처음'의 이미지까지 상기시킨다.


2) 신화적 요소- 고대 그리스 로마

오프닝 시퀀스에 등장하는 청동상

<콜바넴>은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이 배경이 되는 공간을 낙원으로 묘사하기 위해 성서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이야기를 가져온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가 동성애가 가장 이상적 형태의 사랑으로 여겨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15] 영화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석상, 청동상의 이미지가 연속적으로 나오는 오프닝 시퀀스로 시작한다. 청동상의 이미지는 극 중에서도 등장한다. 극 초반에 엘리오, 올리버 그리고 펄만 교수는 파선으로 유실된 고대 청동상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르다 호수로 향한다. 여기서 펄만 교수가 2세기 로마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를 언급하는데, 이때 건져내는 청동상이 엘리오를 무척 닮았다. 실제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안티누스라는 남성 연인이 있었는데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여기서 건져 올리는 청동상은 안티누스의 상은 아니지만, 영화가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과 영화 속 인물들을 연결짓는 양상을 고려했을 때 안티누스와 엘리오를 동등한 관계에 놓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16] 이 장면 직전에 엘리오와 올리버가 청동상에서 떨어져 나온 팔을 사이에 두고 악수를 하는데, 이 장면에서 말 그대로 고대 그리스 로마인과 영화 속 인물이 이어진다. 펄만 교수와 올리버가 청동상 슬라이드를 넘겨보면서 교수가 "마치 자신을 갈망해보라고 부추기는 것 같죠"라고 말할 때 올리버가 교수를 쳐다보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수가 엘리오와 올리버의 관계를 알고, 그들의 관계를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과 대칭하고 있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성서 레퍼런스와 마찬가지로 사운드트랙에서도 고대 그리스 레퍼런스가 등장한다. 엘리오와 올리버가 그들 사랑이 시작된 수영장과 호수, 즉 물의 근원지인 폭포로 여행을 떠났을 때 스푸얀 스티븐스의 노래 '사랑의 신비 Mystery of Love'가 흐른다. 가사에 '알렉산더의 연인 Alexander's Lover'가 언급되는데 이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의 남성 연인 헤파이스티온을 가리킨다. 엘리오가 노래의 화자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는 올리버를 알렉산더에, 자신을 헤파이스티온에 대유하고 있다.

호수에서 발견한 엘리오를 닮은 청동상
영화 속 인물들을 잇는 고대 그리스 동상


3) <콜바넴>의 동성애  

인류 전체의 낙원이었던 에덴의 비유에 멈추지 않고, 동성애자의 낙원이었던 그리스 로마 시대의 레퍼런스가 등장했기 때문에 이 영화는 동성애라는 맥락 안에서 탐구된다. 다시 말해서 <콜바넴>에 등장하는 동성애는 이성애적 중심의 섹슈얼리티의 해방으로서의 동성애가 아닌, 온전히 동성간의 사랑으로서의 동성애이다. 단순히 동성애를 '코드'로 다른 무언가를 말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닌, 동성애만을 이야기했다는 점 또한 LGBT 커뮤니티에서 얻는 호응의 원천이다. 엘리오는 낙원에서 동성애자로서 아파하고, 사랑하고 결국 성장한다. 극중에서 엘리오가 갑자기 피를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평론가들은 근대의 질병과 무의식적 욕망의 관계를 밝힌 수전 손택의 논의 근거하여 태국 영화 <친애하는 당신>(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002)과 대만 영화 <하류>(차이밍 량, 1997)에서 주인공이 호소하는 원인 모를 피부병과 목의 통증이 억압된 동성애적 욕망이 신체적 질병의 징후로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17] 엘리오가 식탁에서 갑자기 코피를 쏟자 부모님들은 늘 그랬다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넘긴다. 이는 그의 동성애적 욕망의 실천이 이뤄지지 않아 습관적으로 코피를 쏟는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엘리오의 신체를 둘러싸 '흐르는' 물, 정액, 그리고 소변과 '역류하는' 코피는 대조된다. 엘리오가 올리버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엘리오가 보이는 구토 증세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엘리오의 동성애적 욕망이 실현되지 않을 때 이 같은 아픔을 보이지만, 엘리오가 올리버와 사랑을 이룰 때 그것은 초월에 이른다. 엘리오와 올리버는 성관계를 맺고 나서 서로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부르기로 약속한다. 엘리오가 자신의 이름으로 올리버를 부르고 올리버가 자신의 이름으로 엘리오를 부를 때, 그들은 자신의 몸과 정신을 넘어서 타인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 초월의 경험은 엘리오와 마르치아(에스터 가렐)의 이성애적 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동성의 사람과 사랑하는 관계에서 초월의 경험을 한 엘리오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사랑으로 무엇이 가능한지 확인한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1] Megan Hughes, “CALL ME BY YOUR NAME, OR THE ART OF DE-QUEERING NARRATIVES FOR STRAIGHT AUDIENCES”, 2018, 2018년11월01접속, https://torch.ox.ac.uk/call-me-your-name-or-art-de-queering-narratives-straight-audiences 

[2] 김혜리, 박찬욱 인터뷰, 『아가씨 아카입』, 그책, 2017, p.338

[3] SAG-AFTRA Foundation. “Conversations with CALL ME BY YOUR NAME”. 2018, 2018년11월01일접속 https://www.youtube.com/watch?v=SaASgSf5O0k 

[4] 영상진흥위원회 박스오피스, 2018년11월01일접속. 두 영화 모두 청소년관람불가 영화이다.

[5] 최화선, 종교와 영화 4 ppt, 슬라이드 17

[6] 정진홍, 「신화를 사는 삶」, 『종교문화의 이해』, 청년사, 2000, p.66

[7] 김윤아 외, 『신화, 영화와 만나다』, 만남, 2011, p.20

[8] 김희수, 「성서는 동성애에 대해 정말 무엇이라고 하는가?」, 『종교문화연구』 제17호, 2011년 12월, p.199

[9] 같은 논문, p.204 “최후만찬 장면에서 식사할 때 예수에게 안겨 있는 제자의 모습은 그 육체적친밀함에 의해 그들이 친구나 평범한 동료가 아닌 연인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요한 13:21-26)”

[10] 같은 논문, p.205

[11] 정원희, 「한국 개신교의 동성애 논쟁과 사회적 실천 : 감정 동학과 종교적 의례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석사학위논문, 2013, p.41

[12] 김윤아 외, 『신화, 영화와 만나다』, 만남, 2011, p.260

[13] 정진홍, 「신화를 사는 삶」, 『종교문화의 이해』, 청년사, 2000, pp.63~64

[14] 극 초반에서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바흐의 곡을 피아노로 연주해주면서 바흐가 이 곡을 그의 형제에게 바쳤다고 알려준다. 스푸얀 스티븐스의 ‘소용없는 것들 Futile Devices’의 ‘나는 당신을 내 형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I think of you as my brother’가사에 1인칭을 사용하여 엘리오 자신이 노래의 화자임을 직접적으로 밝힌다. 여기서‘형제 brother’는 올리버를 가르킨다.

[15] 윤일권, 「고대 그리스 사회와 신화 속의 동성애」, 『유럽사회문화』 제3호, 2009 (*당시 동성애는 여성 혐오를 기반으로 정당화되기도 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겠다.)

[16] Benjamin Eldon Stevens, CLASSICAL DESIRES IN CALL ME BY YOUR NAME (DIR. LUCA GUADAGNINO 2017), Fabien Bièvre-Perrin (éd.), Antiquipop, 28/01/2018, https://antiquipop.hypotheses.org/antiquipop-english/3264eng (consulté le 01/11/2018)

[17] 주진숙, 김경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영화의 퀴어다움을 찾아서 - <친애하는 당신>과 <열대병>을 중심으로」, 『영화연구』 48호, 한국영화학회, 2011, p.378 (*공교롭게도 <친애하는 당신>을 포함한 많은 아피찻퐁 영화의 DP로 활동한 사욤부 묵디프롬이 <콜바넴>의 DP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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