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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Jan 14. 2019

성소수자들이 선택하는 신화로서 퀴어 영화 (2)

<콜 미 바이 유어 네임>(2017)과 <아가씨>(2016)를 중심으로

3. <아가씨>(2016)


1) 신화적 요소- 비현실적 배경

<아가씨>의 퀴어 판타지는 동성애자 인물이 성공적으로 사랑에 빠지고 억압으로부터 탈출한다는 것이다. 이 판타지 역시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비범한 인물들에 의해 펼쳐진다. <콜바넴>과 마찬가지로 <아가씨>는 시대는 일제강점기로 명시되지만, 지역은 조선의 어딘가로 불분명하게 주어진다. 하지만 <콜바넴>의 공간이 천국이라면, <아가씨>의 세계는 지옥이다. 주인공 숙희(김태리)가 집을 떠나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 집은 고딕 호러 영화에 나올법한 저택이다. 숙희를 안내해주는 사사키 부인(김해숙)이 저택의 구조를 알려주면서 덧붙이는 대사 "양식, 일식이 하나로 붙은 건물은 일본에도 없다지?"는 공간의 비현실성에 더한다. 숙희는 장엄한 저택에 주눅 든 모습으로 묘사되지만, 곧 그녀도 보통이 아닌 인물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녀의 어머니는 대 도둑 출신이며, 그녀 또한 '보영당'이라는 도둑 소굴에서 도둑질에 능한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하지만 숙희의 어머니는 그녀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천 번 도둑질하고 딱 한 번 잡혀"서 죽게 돼 숙희는 고아가 된다. 숙희와 동등한 위치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분하는 히데코(김민희)는 어머니가 자신을 낳다가 돌아가셨고, 일본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교양을 갖춘 여성이다. 비범한 고아라는 두 여성의 공통점은 영웅의 조건이기도 하다.

양식과 일식이 하나로 붙은 저택의 내부 모습


2) 신화적 요소- 영웅 서사

두 여성의 모험은 영웅 서사를 따르는 방식으로 펼쳐진다. 다만 <아가씨>는 3막 구조로 나누어져 뒤로 갈수록 진실이 밝혀지는 비선형적 구조를 따르고 있으므로, 두 여성의 영웅 서사는 비선형 구조에 따라 꼬아져 있는 형태이다.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영웅의 모험에 따르면 첫 번째 단계는 ‘일상세계’이다. 숙희의 일상세계는 1막에 등장하는 보영당 도둑 소굴이다. 숙희는 "한밑천 잡아 조선 땅 뜬다"는 탈출의 야망을 품은 소녀이다. 히데코의 일상세계는 저택에서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를 위해 포르노그래피를 낭독하는 것이다. 책의 보존을 위해 햇볕 한 줌 들지 않게 설계된 저택에 히데코는 갇혀 탈출조차 꿈꿀 수 없다. 제 이모(문소리)가 탈출을 시도했다가 이모부에게 고문당해 끔찍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히데코의 인생은 고통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만 꿈꾸는 삶이다. 두 번째 단계인 ‘모험에의 소명’은 같은 인물에 의해 두 인물에게 제시된다. 시간 순대로 후지와라 백작(하정우)은 먼저 히데코에게 접근한다. 그는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그녀에게 결혼을 제안한다. 그 대가로 그녀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한다. 히데코는 자신의 과거를 봉인하고 새 출발을 하고 싶다며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하녀를 새로 데려와 줄 것을 요구한다. 숙희가 바로 그 하녀이다. 후지와라 백작은 금전적 보상을 제안하며 숙희가 아가씨의 하녀로 들어올 것을 제안한다.


세 번째 단계는 ‘소명의 거부’이다. 숙희와 히데코의 여정은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여기서 ‘소명’은 구원자의 소명이다. 이 소명은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다. 두 여자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깨닫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 단계 사이에 이미 진행되었다. 숙희는 히데코에게 첫눈에 반한다. 히데코에 대한 숙희의 사랑은 그녀를 씻기고 입히면서 발현된다. 그 과정에서 숙희가 "이 많은 단추는 다 나 좋으라고 있지", "여지껏 내 손으로 씻기고 입힌 것 중에 이렇게 예쁜 게 있었나…"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내레이션에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여타 성소수자 영화와는 달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생략되고 현실세계에서 많은 동성애자들이 갈등하는 내재된 호모포비아가 없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숙희의 에로틱한 사랑이 모성애와 닮았다는 점이다. 전자는 히데코도 마찬가지이다. 히데코는 숙희에게 "네 얼굴 자려고 누우면 꼭 생각나더라"며 직설적으로 상대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다. 이들에게 동성 상대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편 숙희가 히데코에 대한 에로틱한 사랑을 모성적인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그녀가 오직 모성애의 형식으로 발현되는 사랑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자 레나타 살레츨에 의하면 아이를 가질지 말지를 결정하면서 서로 충돌하는 욕망과 씨름하는 많은 여성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이 세상에 어떻게 나왔을까 라는 질문에 맞닥뜨린다고 말한다. 숙희의 모성애는 고아인 자기 존재를 긍정하기 위해 필요했던 어떤 믿음을 그녀 스스로 자신에게 제공하는 과정에서 함양된 불가결한 자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8] 둘이 버섯을 따러 가는 장면에서 숙희의 사랑이 히데코에게 전달된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히데코의 한탄에 "태어난 게 잘못인 아기는 없어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리고 자신을 여태 살아오게 한 주문과도 같은 그 말 "너를 낳고 죽을 수 있어서 운이 좋았다고, 하나도 억울하지 않다고"를 스스로 엄마가 되어서 히데코에게 건네주는 순간, 숙희는 히데코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한 것이다. [19] 그 말을 들은 히데코는 "책에서 나오는 동무라는 것, 이런 것일까?"라고 생각하며 숙희의 사랑을 확인한다. 두 여자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다.

모성애로 사랑을 배운 숙희가 히데코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이들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기존에 세워둔 각자의 목표를 버리고 사랑을 실천하기로 마음먹는 것은 쉽지 않다. 히데코가 숙희에게 자신은 백작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자, 숙희는 히데코가 후지와라 백작과 "사랑하실 거"라며 구원자로서 소명을 거부한다. 고백을 거절받고 상처 받은 히데코는 자살을 결심한다. 이것이 히데코의 소명의 거부이다. 하지만 곧 두 여자는 서로의 진실을 확인하고 다섯 번째 단계, ‘첫 관문을 통과’한다. [20] 벚꽃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하려는 히데코를 숙희가 막고 자신이 아가씨를 속였다며 잘못했다고 빈다. 히데코도 이전까지 숙희를 가명 '타마코'라고 부르다가 숙희라고 부르며, 자신도 상대를 속이려 했다고 털어놓는다. 서로의 진실을 알게 된 두 여자는 새로운 계획을 짜 협심하여 저들을 억압하는 남자들을 따돌리기로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다섯 번째 단계까지 넘어오는 과정이 퀴어 영화 치고는 너무 수월하다는 점이 이 영화를 퀴어 판타지 영화로 만든다. 숙희와 히데코에게는 남성으로부터의 억압만이 극복의 대상이다. 계급이나 국적 또한 극복의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숙희와 히데코의 모성에 기반한 사랑이 남성 인물과 대조를 이루면서 이 영웅-장애물 구도를 형성한다.


여섯 번째 단계에서는 영웅이 몇 가지 ‘시험’을 거치면서 협력자와 적대자를 만난다. 숙희와 히데코는 한 팀으로 계획을 짜면서 보영당 식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영화의 2막에서 낭독회의 진실이 드러나면서 코우즈키가 후지와라 백작과 함께 적대자로 설정된다. 여기서 일곱 번째 단계의 ‘심연에 접근’과 6단계의 ‘시험’의 순서가 바뀌어 ‘심연에 접근하는 것’이 ‘시험’보다 먼저 온다. 저택에서 후지와라 백작과 달아나기 전에, 히데코는 숙희를 낭독회가 열리는 서재로 데려간다. 숙희는 거기서 히데코가 낭독회에서 남자들을 위해 포르노그래피를 읽기를 강요당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랑하는 이가 십여 년간 남성으로부터 폭력을 당해왔다는 사실에 분개한 숙희는 단도로 책을 찢고 책장을 무너뜨리고 책을 물에 적셔 서재를 파괴한다.

'심연에 접근' 숙희가 서재의 비밀을 알고 히데코와 함께 서재를 파괴한다.


그 이후 ‘시험’의 단계는 탈출한 후,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을 하고 백작이 히데코의 재산을 현금으로 바꿔 오길 기다리는 과정이다. 후지와라 백작의 감시를 피해 숙희와 히데코는 작전을 들키지 않는 데 성공한다. 여덟 번째 단계에서는 주인공 둘 다 ‘시련’을 겪는다. 숙희는 계획 성사를 위해 정신병원에 갇히고 히데코는 백작을 홀로 따돌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숙희는 조력자의 도움을 얻어 정신병원으로부터 탈출하고, 히데코는 백작을 기절시키고 돈을 챙겨 숙희와 재회한다. 이것이 아홉 번째 단계의 ‘보상’, 열 번째 단계의 ‘귀환’이다. 열한 번째 단계는 ‘부활’이다. 히데코는 벚나무에서 죽었다가 살아나고, 숙희는 정신병원에서 죽었다 살아나 두 주인공은 새로운 차림을 하고 상하이로 떠난다. 마지막 단계인 ‘묘약과의 일상세계로의 귀환’은 없다. 대신 숙희-히데코 커플의 새로운 일상인 유희적 성관계를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3) <아가씨>의 동성애

서재를 파괴하고 들판을 내달리는 두 여자

히데코는 숙희와 달아나며 속으로 생각한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숙희와 히데코가 동성애적 관계에서 이룬 사랑은 구원이다.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은 숙희를 물질주의로부터, 히데코를 죽음으로부터 구원한다. 숙희는 히데코와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물질적 부를 모아 조선 땅을 뜰 생각에 물욕에 눈이 멀어있었다. 히데코는 숙희와 만나기 전까지는 죽음에 사로잡힌 삶을 살고 있었다. 이런 두 여자의 약점을 잡아 후지와라 백작은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숙희에게는 재물을, 히데코에게는 자살을 쉽게 하는 아편을 대가로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한다. 하지만 백작이 그들에게 제안하는 것은 표면적 자유, 가짜 자유이다.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은 두 여성을 진짜 구원으로 인도한다. 이 구원을 통해 히데코는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되고, 숙희에게는 재물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긴다. 특히 히데코의 구원에 있어서 남자들의 세계에서 사용되던 언어를 자신만의 맥락에서 재전유(reappropriate)하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극 중에서 히데코를 억압하는 남성 페티시의 산물은 낭독회, 구슬, 채찍, 코르셋 등이다. 동시에 그것은 히데코가 아는 유일한 세계이다. 애초에 히데코는 그런 과거를 잊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고자 백작에게 하녀를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히데코가 숙희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자신의 세계를 숙희와 새롭게 공유한다. 히데코는 낭독회에서 정전으로 불이 꺼지고 남성 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자 스스로 자신과 숙희를 대입하여 레즈비언 섹스를 상상한다. 그녀의 상상은 과거 자신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한 구슬을 사용하여 마지막 장면에서 실현된다. 재전유의 테마는 <아가씨> 영화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아가씨는 가부장의 세계에서 시작해 이름 없는 여성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로 자리 잡은 단어이다. 이 단어가 숙희를 통해 히데코에게 재전달될 때 이 낱말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다.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히데코의 인생 전체가,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까지 구원될 수 있었다. 두 여성의 사랑이 서로를 구원하고 남성 지배 사회를 전복시킨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진 한 달 뒤에 개봉했다. 여성 영웅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영화가 개봉했다는 시의성 또한 <아가씨>가 레즈비언 커뮤니티 내에서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4. 결론


신형철 평론가는 <아가씨>에 대한 평론을 다음과 같이 맺었다. "어떤 소재를 다루건 성공의 영화는 많은 경우 판타지다. 그러나 같은 판타지라 하더라도 강자의 나르시즘을 강화하는 판타지보다 약자의 용기를 복둗우는 판타지를 더 크게 비난하는 것은 공정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시간에 적절히 도착한 판타지가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환영하게 되는 것이다." [21] 현대 성소수자 관객에게 <콜바넴>과 <아가씨>는 판타지이자 신화이다. 두 영화에서는 등장인물들이 현실에서처럼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차별받고 고통받는 모습은 없다. 동성애자의 사랑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는 모습만 있을 뿐이다. 그 비현실성은 영화 속 배경의 신비함과 등장인물의 비범성으로 증폭된다. 관객은 영화 속 비범한 인물들의 특별한 사랑의 처음과 끝을 보면서 사랑, 구체적으로 동성애의 초월과 구원이라는 가능성을 알게 된다. 각 영화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만, 두 연인이 동성애자이고 둘 사이의 사랑은 동성애자들이 수행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관객은 이 이야기에서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두 영화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만의 의미를 찾고 그 이야기를 공유하는 양상은 신화와 많이 닮아있다. 어떤 이는 <콜바넴>을 극장에서 보고 용기를 얻어 집에 돌아가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했다고 하고, 국내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는 서로의 취향을 물을 때 ‘숙희가 좋아, 히데코가 좋아?’라고 묻기도 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아가씨>는 1년이라는 시간이 넘도록 폭발적 인기를 끌었고, 그 인기가 식기도 전에 <콜바넴>이 개봉했다. 두 영화는 성소수자들 사이에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한편 한국에서는 2018년 11월 현재까지도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지 않고 있다. 신화를 통해 성소수자들이 삶의 용기를 얻을 수는 있지만, 이 같은 제도적 문제는 한정된 집단의 용기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의 힘이 다시 중요해진다. 다른 사람의 역사와 정체성이 담긴 이야기를 들을 때, 그 시간만큼은 타인의 인생을 체험할 수 있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환영하고 경청하는 일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기이다.  



[18] 신형철, 「사랑에 실패하는 남성적 방식과 그 너머의 길」, 『아가씨 아카입』, 그책, 2017, p.117

[19] 같은 책

[20] 네 번째 단계인 정신적 스승의 만남은 일상세계에서 이미 이뤄졌다. 정신적 스승은 숙희에게는 죽은 엄마와 장물어미이고, 히데코에게는 죽은 이모이다.

[21] 신형철, 「사랑에 실패하는 남성적 방식과 그 너머의 길」, 『아가씨 아카입』, 그책, 2017,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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