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미러 시즌5를 시청하고
1. VR: <striking vipers>
초등학교 시절 동네 남자 사람 친구네 집에서 스트리트 파이터즈를 자주 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는 엄마끼리 친했는데 우리 엄마 둘 다 집에 비디오 게임을 들여놓지 않아서 몰래 PC로 잠깐씩밖에 하지 못했었던 것 같다. 블랙미러 시즌 5의 첫 번째 에피소드인 <striking vipers>도 두 친구가 몰래 게임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에피소드 제목 '스트라이킹 바이퍼스 striking vipers'가 바로 이 두 사람이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이고, 친구랑 어릴 적 하던 스트리트 파이터즈와 상당히 비슷한 게임이다. 주인공 대니는 남자 캐릭터를 플레이하고 친구 칼은 여자 캐릭터를 플레이한다. 두 사람은 대니의 여자 친구 테오 몰래 게임을 하다가 시끄럽다고 한 소리 듣게 된다. 십수 년이 지나고 대니와 테오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생겼고, 대니의 서른몇번째 생일을 맞아 아주 지루하고 백인스러운 바베큐 파티를 하고 있다. 대니와 테오의 사이는 여전하지만, 대니는 다른 여자의 엉덩이 골을 쳐다보는 등 자신의 중년 라이프에 권태로움을 느끼는 듯하다. 칼은 오랜만에 대니와 테오 집을 찾아 대니에게 생일선물로 추억의 게임 '스트라이킹 바이퍼스'의 VR버전을 선물한다. 세월이 흐른 만큼 게임이 업그레이드되어 VR 게임 버전이 나온 것이다. 칼은 그날 저녁 대니에게 같이 게임을 하자고 하고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게임 속 세상에서 서로를 만난다. 둘이서 게임 한판을 하고 두 번째 라운드를 하려고 하는데 서로 부둥키고 얽히다가 갑자기 키스까지 하게 된다. 내 친구한테 욕망을 느낀 걸까 게임 속 캐릭터에게 욕망을 느낀 걸까?
어려운 질문을 많이 하는 에피소드다. 첫 번째 질문은 "나의 아바타 캐릭터는 내 육체와 어떤 상관관계에 있을까?"이다. 게임 플레이를 해봤다면 한 번쯤은 자신의 아바타를 만들 일이 있을 텐데, 아바타에는 다양한 욕망이 함축되어 있기 마련이다. 아바타는 내가 되고 싶은 것 혹은 내가 플레이하면서 많이 보고 싶은 것이다.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거나 자신의 욕망의 대상인 아바타는 어찌 됐건 간에 플레이어의 욕망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내 육체와 완벽하게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바타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겉보기에 상당히 '남자다운' 흑인 남성 대니 칼이 게임에서 동양인 캐릭터를 플레이한다는 것이다. 대니는 웃통을 벗은 근육질의 동양인 남자고, 칼은 오버 섹슈얼라이즈된 동양인 여자다. 예전에 친구들이랑 플레이했던 게임을 생각해보면 (요즘 '발전된' 최신 게임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주어진 캐릭터들이 상당히 백인스럽거나, 동양인스러운 캐릭터와 백인 캐릭터 중에서 선택해야하면 보통 후자를 선택하곤 했다. 북미 사회에서 흑인과 동양인이 각각 갖는 스테레오 타입이나 두 인종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더 흥미로운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 칼은 여자로서 하는 섹스에 더욱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인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아바타의 특성이 플레이어 욕망의 대상으로서 아바타가 아닌 욕망의 주체로서 아바타인 것을 암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니까 칼이 초반에 합리화 했던 것처럼 구경하는 ‘포르노’가 아니라는 말이다.
<striking vipers>가 하고 있는 두 번째 질문은 "정신적 성적 교감과 육체적 성적 교감의 차이는 무엇일까?"이다. 아무리 나의 아바타가 나의 욕망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어도 아바타끼리의 섹스는 현실의 육체는 배제된, 정신의 섹스일 것이다. 친구의 아바타와 나의 아바타가 서로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면 현실의 우리도 현실에서 서로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는 뜻일까? 이 질문에 <striking vipers>는 '아니'라고 답한다. 아바타와의 관계를 이어나가던 대니와 칼은 찝찝한 마음에 현실의 서로에게도 끌림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키스를 시도해본다. 그 결과 실제로는 딱히 별 느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두 사람은 더욱더 혼돈에 빠지게 된다.
<striking vipers>의 마지막 질문은 "VR이 현실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이다. VR은 virtual reality로 말 그대로 가상현실이다. AR (augmented reality)와는 다른 개념으로 AR이 가상의 것이 가미된 현실이라면, VR은 현실과의 물리적 법칙이 동일한 평행 세계와 비슷한 개념이다. <striking vipers>가 처음에 보여주는 듯한 VR에 대한 입장은 부정적인 것이다. VR 게임에 접속하는 순간 댄과 칼의 눈빛은 흐리멍덩해지고, 그들이 접속하게 되는 계기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여 도피하고 싶은 이유에서이다. <striking vipers>가 제안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도피의 '대안적 차용'이다. 대니와 테오 부부는 두 사람이 겪고 있는 권태로움에 대해 털어놓기로 하고, 그 후 일 년에 하루 서로에게 주는 선물로서 일탈을 허용한다. 썩 시원한 해답은 아니지만 1시간이라는 시간 안에 더 좋은 답변을 내놓기도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다. 좀 더 파고들었으면 좋았겠다는 부분은 칼의 이야기이다. 가상현실과 아바타가 현실의 육체와 성 정체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앞으로 할 얘기가 차고 넘치는 주제인 것 같다.
2. SNS: <smithereens>
<smithereens>는 런던 배경의 미스터리 추리극(?)이고 앤드류 스캇이 주인공이다. 즉 BBC 셜록을 좋아한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숨도 안 쉬고 즐기면서 볼 수 있다. (앤드류 스캇은 셜록의 모리아티를 연기했다.) 앤드류 스캇이 연기하는 우버 드라이버는 매일 아침 소셜 네트워크 플랫폼 사옥 스미더린 smithereens 빌딩 앞에서 기다리다가 승객을 태운다. 승객한테 매번 스미더린에서 일하냐고 묻는데, 하루는 진짜 스미더린 직원을 태웠다는 사실을 알고는 납치극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에피소드의 미스터리는 이 남자의 납치(?) 동기는 무엇인지이고, 그것을 미국 경찰, 영국 경찰, 그리고 스미더린 본사 사람들이 추리해간다. 이쯤에서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예측하는 것을 절대 못한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그래서 나보다 좀 더 감이 좋은 사람들은 덜 재밌게 봤을 수도 있지만, 나처럼 뇌가 순수한 사람들은 세 에피소드 중에 이걸 가장 재밌게 보지 않을까 싶다. 미스터리 추리극인 만큼 스포일러는 최대한 피하고 이 에피소드가 던지는 의제에 관해 바로 이야기해보겠다.
이 에피소드가 문제시하고 있는 것은 소셜 네트워크 중독으로, 블랙미러가 자주 다뤄왔던, 거의 PSA(public service announcement, 공익광고)에 가깝다고 할 모범적인 주제다. 이 주제가 형성하는 극의 드라마 또한 볼만하지만, 내가 더 관심을 가졌던 것은 동시에 다루고 있는 또 다른 문제의식이다. 그것은 바로 데이터 시대의 '공권력의 무능함'이다. 극에서 등장하는 권력은 영국 경찰 <미국 경찰 FBI <스미 더린 <스미 더린 대표 빌리 바우어 순으로 힘이 세다. 블랙미러가 영국에서 만든 시리즈인 만큼 영국의 관료주의에 비관적인 것 같고, 그다음으로 비슷하게 미국 경찰 FBI도 추리극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스미더린 본사에서 유저들의 활동에 관련해서 더 빠르게 정보를 입수하기 때문이다. 영국 경찰이 직접 집에 가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야 입수할 수 있었던 정보를 스미더린 헤드쿼터 사람들은 타임라인을 쓱 체크하고서 바로 알아낸다. 이들보다 더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스미더린을 만든 빌리 바우어다. 스미더린 경영자들이 빌리 바우어에게 납치범 번호를 알려주길 거부하자, 빌리 바우어는 자신이 머물고 있는 산 꼭대기에서 납치범의 이름 정도만 알고서는 '신 모드'에 돌입해 코딩 몇줄만으로 그의 번호를 알아낸다. 빌리 바우어에게 이 소식이 닿는 과정도 볼 만하다. 앤드류 스캇과 (알고 보니 인턴밖에 안 되는) 피해자의 긴박한 상황과 경영자들끼리 빌리 바우어를 방해하지 않고 싶어 전전긍긍해하는 구도가 대립되면서 공권력 외부의 시스템도 마찬가지로 관료주의적이고 비효율적이라고 풍자하고 있다. 스미더린-빌리 바우어는 딱 봐도 페이스북-마크 저커버그인데 블랙 미러가 고소당하고 싶지 않아서인지 일부러 트위터 인터페이스처럼 만들어서 페이스북은 '페르소나'라는 다른 플랫폼으로 설정해놨다. 공익광고처럼 결국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맞지만, 추가적인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단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하는 팽팽한 앤드류 스캇의 연기만으로도 세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재밌는 에피소드이다.
+) 스코어를 류이치 사카모토가 맡았다고 한다. 딱히 그의 스코어가 두드러질만한 장면이 없어서 크레딧이 올라갈 때 놀랐다.
https://www.youtube.com/watch?v=NI6amXlxTvo
3. AI: <Rachel, Jack and Ashley O>
블랙미러 시즌5에서 가장 홍보를 많이 한 에피소드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했던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마일리 사이러스가 분홍색 가발을 쓰고 아이돌로 나오는데, 딱 봐도 하나 몬타나 시절 마일리 사이러스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2010년에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그때 나는 나이가 14살~15살이었다. 하나 몬타나를 좋아하기에는 좀 나이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대충 다 그 나이 때에 좋아했던 것 같아서 그렇게 많았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하나 몬타나를 진짜 좋아해서 에피소드를 다 다운받아 전자사전에 넣어서 보고 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에서 마일리가 어느 날 꿈을 꾸는데 자신의 하나 몬타나 이미지가 싫어져서 완전 하드코어 펑크락 이미지로 변천하는 내용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 에피소드만 해도 한 2008-9년 에피소드여서 '역시 나는 지금 이미지가 좋아요' 식으로 끝났는데 그게 참 불편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에게 안 좋은 메시지이기도 하고, 해당 에피소드 방영 후 몇 년 뒤 현실과 너무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일리 사이러스가 지금의 마일리 사이러스이기 전에 'Can't be Tamed'로 섹시 펑크락 이미지 변신을 했는데 그것만 해도 하나 몬타나 팬들에게 큰 충격을 줬던 기억이 난다. '가짜 이미지' 때문에 고통받는 스타 역에 마일리 사이러스만큼 메타적으로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
<Rachel, Jack and Ashley O>에서 마일리 사이러스가 연기하는 애슐리 오 Ashley O는 하나 몬타나 시절의 마일리 사이러스+요즘 여자 팝스타의 평균적 모습이다. 내 생각에는 마일리 사이러스의 예전 모습보다는 테일러 스위프트나 아리아나 그란데 활동 초기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유튜브에 노래를 올리는 걸로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한 부분이 그들과 많이 닮아있다. 여하튼 애슐리 오의 컨셉은 여자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섹스어필을 하는 여자 아이돌이다. 주인공 레이첼은 애슐리 오의 음악을 좋아하고 레이첼의 언니 잭은 그런 노래의 정 반대라고 할 수 있는 펑크락 음악을 좋아하는 베이시스트이다. 두 소녀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쥐를 잡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다정하지만 두 딸에게는 무관심한 매드 사이언티스트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어느 날 애슐리 오가 토크쇼에 나와 자신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했다는 AI 인형 Ashley Too를 소개한다. 애슐리의 팬인 레이첼은 아빠에게 생일선물로 애슐리 투를 사달라고 하고, 친구가 많지 않은 레이첼은 애슐리 투에게 정신적으로 크게 의존하게 된다. 한편 진짜 애슐리는 본인의 컨셉에 자신이 갇혔다고 느끼고, 우울해하는 애슐리를 보고 그녀의 매니저이자 고모인 캐서린은 못마땅해한다. 새 앨범을 빨리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캐서린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여 애슐리를 뇌사상태에 빠뜨린다. 기술의 도움(?)으로 애슐리의 뇌 활동을 받아 적어 뇌사상태에서도 작곡을 하는 감동 스토리를 팔아먹어 애슐리 오의 컨셉을 존속시킨다. 레이첼의 Ashley Too 인형이 이 사건을 뉴스로 보고 과부하 상태(?)가 되자 레이첼과 잭은 아빠의 연구실로 내려가 의도치 않게 AI 인형에 복사된 애슐리의 뇌를 풀가동화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레이첼과 애슐리가 만나면서 하나 몬타나스러운 틴무비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이전의 두 에피소드에 비해 단순한 구조의 이야기이고 테크놀로지에 관련해서도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지 않다. 세 소녀가 힘을 합쳐 ‘더러운 시스템'에 저항하는 밝고 재미있는 이야기다. 때문에 예전의 하나 몬타나 시리즈를 보는 느낌도 들었다. 이야기에 너무 구멍이 많기 때문에 싫어할 사람들도 (특히 남자 관객들)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AI 인형을 실제 인물의 뇌를 그대로 복사하여 방화벽만 설치해서 생산했다는 설정은 너무 빈약하기도 하고, 애슐리와 잭의 문제는 해결됐으나 레이첼의 자존감 문제와 두 딸내미에게 무관심한 아버지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문제는 22살부터 애슐리를 맡아서 키워온 고모 캐릭터를 너무 빌런화 시켜 깊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제작진들도 가벼운 틴 무비를 만들고 싶었던 것 같고, 그것으로는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마지막 장면으로 애슐리 오가 락 퍼포먼스를 하는 모습은 마일리 사이러스의 'Can't be Tamed' 시절과 비슷해 추억 돋기도 했고, 뭐가 됐든 간에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하나 몬타나 에피소드를 보던 그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 크레딧에 트렌트 레즈너가 있길래 스코어를 담당한 줄 알았더니 여기서 애슐리 오가 부른 노래 두 개가 트렌트 레즈너의 밴드 Nine Inch Nails의 노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