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보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이하 부국제)에서 유난히 유명 해외 영화감독들의 기대작을 많이 상영했던 것 같은데, 그중 하나가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었다. 테리 길리엄의 부국제의 영잘알들의 컬트 페이버릿 <몬티 파이선> <12 몽키스> 등 난해한 롤러코스터 같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다. 그 미친 감독이 투자, 캐스팅에 우여곡절을 겪어 3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 세상의 빛을 보게 된 작품이 이 영화다. 다들 이 감독이 안쓰럽다는 내러티브를 설정하는 것 같은데, 투자와 캐스팅에서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아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 늦어졌다면 그것이 정말 이 감독을 비운의 사나이로 만드는 것인가. 이 유명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부국제 현장 티케팅 부스 앞에서 밤을 새우게 만들 만큼 필자에게는 흥미롭지 않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렇게 30년간 제작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 영화가 메타영화라는 것이다. 어떻게 메타영화인지 설명에 들어가기 전에 이 영화는 그렇게 보지 않아도 충분히 재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아까 이 사람의 전작들을 ‘난해한 롤러코스터’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 영화도 그런 영화에 포함된다. 거기다 나같이 (헐벗은) 아담 드라이버를 상당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소 긴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상영 내내 즐거울 수 있다.
다시 메타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이 영화는 창작의 결과와 책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야망 넘치는 무모한 창작자인 주인공 토비는 구원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 질문에 대해 이 영화가 내놓는 답은 ‘그가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만든 세계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야망 넘치는 무모한 창작자, 그리고 그 세계에 종속되어 여생을 보내는 결말.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바로 감독 테리 길리엄의 이야기이다.
토비는 대학생 시절,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스페인의 외딴 시골에서 <<돈키호테>>를 졸업 영화로 리메이크하려 한다. ‘예술 영화’답게 영화는 흑백으로 찍고 배우는 현장에서 즉석으로, 일반인을 캐스팅한다. 여기서 토비는 동네의 한 목수 할아버지를 돈키호테로 캐스팅하고 열몇 살짜리 여자아이를 공주로 캐스팅한다. 토비는 할아버지에게 칼과 방패를 쥐어주고 이제부터 당신은 돈키호테라고 명하고, 여자아이에게 너는 스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무책임한 약속을 한 풋풋한 시절로부터 약 십 년 가까이 지난 뒤, 토비는 자신이 찍었던 돈키호테 영화를 CF 광고로 다시 제작하고 있다. 촬영장에서 온갖 허세는 다 부리지만 뒤에서는 프로듀서들에게 쪼이고 재촉당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번뇌(?)로부터 달아나고자 대학생 시절 자신이 영화를 찍었던 현장으로 잠깐 돌아가는데, 동네가 자신이 기억하던 동네가 아닌 것이다. 평화로웠던 스페인의 시골은 척박하고, 난민들이 가장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의 영화에 돈키호테로 출연한 할아버지는 본업은 잊고 진짜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믿고, 자신이 스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한 소녀는 꿈을 이루기 위해 대도시로 갔다가 돈 많은 남자들 옆에서 어울려주는 것으로 먹고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돈키호테(라고 믿는 할아버지)는 토비를 산초라고 믿고 자신의 모험에 동행하길 강요한다. 그렇게 무모한 창작자 토비의 속죄가 시작한다.
이 이후부터는 현실과 망상이 사막의 신기루처럼 오락가락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망상. 자신이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기사도 정신을 가진 영웅이라는 망상. 풍차를 거인이라고 착각하는 망상. 자신이 돈키호테라는 영화 속 캐릭터라고 믿는 망상.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 난민이 자신을 쫓아와 공격할 것이라는 망상.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매매하는 여성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남자의 망상. 그리고 자신이 위대한 감독, 세계의 창조자라는 망상. 망상에 사로잡혀 이 세상에 큰 민폐를 끼친 자는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 돈키호테 할아버지에게 끌려다니면서 각종 우여곡절을 겪은 토비는 망상으로 인한 착각으로 인해 그를 죽이게 되고(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할아버지의 망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마지막 기사도 정신을 이어받은 영웅이 되어 새로운 산초와 함께 사막 속으로 사라진다. 이 마지막 장면으로써 테리 길리엄은 자기가 만든 망상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노예로 평생 살겠다는 자기 파괴적이고 자조적인 약속을 한다.
언제 한 번은 과제 때문에 영화인 인터뷰를 딸 일이 있었는데, 영화를 왜 만드냐고 물어봤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어서라고 했다. 필자는 그게 나르시시스트적이지 않냐고 물었고 인터뷰이는 맞다고 답했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감독 테리 길리엄을 포함한 모든 무모한 영화인들, 나아가 창작자들의 고백이자 변명, 그리고 사죄이다. 소위 ‘예술’을 핑계로 세상에 대단한 민폐를 끼치는 이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는 그 세계의 일부가 되어 맡은 역할을 무기한으로 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을 가장 견딜 수 없는 사람도 30년이나 걸린 변명은 들어줄 수밖에 없고, 그 변명이 이만큼 재밌고 사랑스럽다면 용서해 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