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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uppysizedelephant Apr 10. 2019

유치원 교사

<나의 작은 시인에게>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를 보고

해외 포스터와 국내 포스터 비교. 해외에선 넷플릭스로 공개됐나 보다.


  <나의 작은 시인에게>의 원제는 <The Kindergarten Teacher>, 즉 <유치원 교사>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유치원 교사 리사(메기 질렌할)와 유치원 생시인 지미(파커 세박)인데, 영제와 한글 제목이 각각 다른 주인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아마 앳나인 수입배급 영화의 주 타깃인 국내 아트 영화 관객에게는 '유치원 교사'보다는 '시인'이라는 워딩이 더 캐치하기 때문에 제목을 바꾼 것이 아닌가 싶다. '시'가 국내 아트 영화 관객에게 인기 키워드로 떠오른 가장 최근의 계기는 2018년 상반기에 개봉한 <패터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나의 작은 시인에게>은 <패터슨>과 소재만 같을 뿐, 상반된 이야기를 하는 듯하다. <패터슨>이 시인이 사는 세상 속 시인만을 바라봤다면, <나의 작은 시인에게>은 그것 외의 모든 것을 말한다. <패터슨>의 배경은 스마트폰도 있고, 스타워즈 시퀄 시리즈도 나오는 현대이지만, 주인공 패터슨은 스마트폰도 쓰지 않고 극장에는 옛날 영화를 보러 간다. 아름다운 부인과 귀여운 라이벌 멍멍이와 함께 사는 이 시인의 아날로그 라이프는 이상적이기도 하지만, 외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 진공 상태 속 예술가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편 <나의 작은 시인에게>은 예술하는 사람의 현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현실은 지금까지 숱한 영화에서 보여준 가난에 허덕이거나 세상으로부터 외면받는 예술가의 모습이 아니다. 어린 시인 지미가 사는 세상은 그의 재능에 관심 있는 사람이 극히 적고, 그의 선생님 리사가 보기엔 저급한 예술이 지나친 호응을 얻는 ‘천박한’ 세상이다. 그녀가 생각하는 이 천박함의 전형은 그녀의 아들 딸이 듣는 힙합 음악이며, 암실에서 현상하지 않고 휴대폰으로 찍어 인스타그램으로 바로 올려버리는 사진이며, 지미의 재능을 몰라주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클럽이다. 즉, 패터슨이 느린 아날로그적 세계로 도피한 이유, 스마트폰과 거대 프랜차이즈 영화가 지배하는 현실이다.


  하지만 영화는 지미의 시를 비롯해 ‘좋은 예술’을 알아주지 못하는 세상을 경멸하는 리사의 시선에 완전히 동의하지도, 동의하지 않지도 않는다. 영화는 리사의 행보를 야릇한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간다. 리사는 시가 잊힌 세상에서 자신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프라이드를 갖는 사람이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그 재능이 없고, 그 재능을 대신 심어 가꿔줄 만한 자식 또한 다 커버렸다. 리사는 지미가 시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그녀의 충족되지 않은 창작욕과 성장욕을 발전 가능성이 무궁한 이 어린아이에게 쏟아붓는다. 이 과정을 묘사하는 영화의 방식이 아주 미묘하고 섬세하다. 초반에 리사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특별한 지미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도와주며 유치원 선생님의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점차 리사는 지미의 가족이 지미를 키우기에 부족하다고 느끼고 자신이 그 책임을 독차지하려 든다. 관심이 불신으로 이어지고, 집착에 이르러 납치까지 감행하여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으려고까지 한다. 지미와의 합의(?)로 경찰을 불러 납치는 실패하지만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영화는 확답을 내리지 않는다. 집착하는 선생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지미는 안전한 사회의 품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이지만, 경찰차의 닫힌 차창 안의 지미가 ‘시상이 떠올랐다’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경찰이 두들기는 키패드 소리만 들릴 뿐이다. 영화는 한 술 더 떠 이 장면을 블랙 화면으로 반복한다. 어려운 문제에는 성급히 해설을 내리면 안 된다고, 나의 작은 시인은 이 허영심 많고 불안정한 정신의 유치원 선생이 어쩌면 작은 시인 지미의 유일한 파수꾼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넌지시 말하며 끝을 맺는다.


   어려운 질문을 하는 영화다.  '천박한' 세상에서 예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인가? 어디서부터 보존이고 어디까지가 허영과 꼰대 짓일까? 나아가 우린 다음 세대와 어떻게 공존할 것이며, 그들을 어떻게 일굴 것인가? 보통 오픈 엔드식의 영화는 완성도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같아서 정말 싫어하는데 <나의 작은 시인에게> 오픈 엔드까지는 아니고 어떤 의제를 세상에 내던진  같고, 러기 위해 많은 것을 쌓아 올린 영화라고 생각한다.  귀중한 의제 말고도 끝내 풀리지 않았던 의문점은 ' 리사가 지미의 시를  수업에 가져갔을까'이다. 시낭송 시간에는 지미를 내세워 그의 명예를 차지하는 비열한 일은 하지 않았으므로 영광을 위해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리사의  수업 선생님(반가운!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시선을 의식하고 그와 섹스를 하기 위해 그랬다는 것으로밖에 해석할  없는데, 여기서 촉발된 성적 긴장감은 리사와 지미와의 관계까지 이어진다. 극의 후반부에 이를 수록  긴장감은 둘의 벗은 몸을 같이 보여주면서 더욱 시각화된다. 리스케한 분위기를 리사-지미의 관계까지 들여온 이유는 무엇일까? 최선의 답은 성적 긴장감이 가장 효과적으로 그에 속한 인물들을 동등한 위치에 놓을  있기 때문이라고   있다. 리사와 지미가 따로 샤워를 하고 똑같이 수건을 두르고 나오는 모습은 리사가 지미를 아이로 보지 않고 독립된 개체로 대하고 있는 것을 가장  드러내는 장면이다. 후기 중에는 이게 젠더 스왑 gender swap 돼도 지탄을 받았을  같다, <레옹>이랑 비슷하지 않냐는 말이 있었는데, <나의 작은 시인에게> 지미는 <레옹> 나탈리 포트만과 달리 성적 대상화되지 않다는 차이점이 있다. <레옹>에서는 레옹이 노골적으로 나탈리 포트만에 대한 욕망, 당혹감을 드러내는 장면이 있는 반면 <나의 작은 시인>에서는 '성적 긴장감' 있을  어떤 매력을 어필하거나 끌린다는 묘사는 일체 없다.  수업 선생님과 유치원 선생님의 관계로부터 유치원 선생님과 유치원생의 관계를 잇는, 그래서  관계의 차이에 집중하게 만드는 일종의 다리bridge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정확하다.


  이 영화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화의 마케팅이다. 아트나인에서 시사가 끝나고 밖에 나오니까 관객들이 시 구절을 하나씩 적는 이벤트를 하고 있었다. '시'라는 소재에 영화의 썩 밝지만은 않은 분위기와 이 발랄한 이벤트가 얼마나 잘 어울리고 영화를 얼마나 정확하게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영화 마케팅 자체가 영화 내용을 제대로 전달하는 일은 거의 없고, 우리나라 아트 영화 굿즈나 마케팅 방식에서 자주 발견되는 오류니까 크게 거슬리진 않았지만 영화가 좋을수록 마케팅이 늘 더 신경 쓰이고 아쉬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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