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년 만에 나온 <기묘한 이야기> 시즌3을 밤새서 보고
0. origin story
때는 2017년 11월, 대2병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었다. 때마침 기말고사 기간이었는데, 시험기간 일주일 동안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매일 밤을 꼬박 새가며 <기묘한 이야기> 시즌 1,2를 클리어했다. 나는 양덕 경력이 꽤 긴 편인데, 내가 수험생이었던 2015년부터 북미를 휩쓴 <기묘한 이야기>라는 엄청난 시리즈를 보기에 대학교 2학년 기말고사 기간이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2학기 성적과 인생 최고의 꿀잼 시간을 등가교환했다. 그 결과 성적은 올타임로우를 찍었지만 후회는 절대 없다! 데모고르곤과의 거래 이후 나는 2년 동안 군대 기다리는 연인처럼 조신하게 한 눈 팔지 않고 새 시즌을 기다렸다.
2018년 간에 기별도 안 가는 티저 영상을 거들떠도 안보며 차분히 기다린 결과 시간이 흘러 여름이 되었다. 2년이 지난 뒤 아직도 학생인 나는 그래도 지지난해보다는 학교에 의욕도 생겼고, 무엇보다 졸업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도 생겨 섣불리 시리즈와 학점을 등가교환하는 일은 저지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옥 같은 기말고사 시험기간을 견디기 위해 귀환의 날 7월 4일 만을 바라보았고, 친구들과 에어비앤비를 빌려 시즌3 정주행을 하기를 약속했다. 약속의 날을 달력에 박아두고 나는 모범수처럼 성실하게 풀려날 날짜를 기다렸다. 대망의 7월 4일이 되었다. 우리 에어비앤비가 위치한 이태원에서는 은폐된 제국주의의 상징이자 계급사회의 상징인 미군부대가 도처에서 폭죽을 터뜨렸다. 우리 또한 정규학기로부터의 일시적 독립을 기념하여 떡볶이와 피자 그리고 중국 라면을 준비한 후 텔레비전 전파를 터뜨렸다.*
*넷플릭스가 어떤 날짜에 시리즈를 공개한다면, 그것은 북미 동부 시간을 말한다. 스띵의 경우 우리나라 기준 7월 4일 오후에 공개되었다. 부디 우리나라 기준 7월 4일 자정에 치맥 시켜놓고 기다린 사람은 없길 바란다. 세상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1. children actor
7시쯤 만나서 텔레비전이 안 켜져 한 시간 동안 끙끙댄 후 8시 30분쯤에 달리기 시작됐다. 키도 크고 목소리도 이상해진 아이들을 보면서 예상보다 이상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소셜미디어로 인해 그들과 우리 사이의 시간에 공백이 없어서이다. 그러면서 이전의 어린 배우들을 생각해본다. 드루 배리모어, 맥컬리 컬린, 다니엘 래드클리프 등등... 남들처럼 똑같이 시간을 같이 흘려보냈을 뿐인데 그 사실을 다 모른 척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못생기고, 늙었고, 더 이상 예쁘지 않다며 시간의 피해자들을 혐오했다. 그리고 그만큼 이질감을 느끼게 만든 이유에는 시간 외에 어떤 은밀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부모의 이혼, 마약, 성적 방종, 퇴학 등 별 썰이 다 돌았다. 소셜미디어 이전의 그들이 부럽긴 하지만, 이런 면에서는 안타깝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여하튼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린애 티를 벗으면 그만큼 연기력도 객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엘 역의 밀리 바비 브라운에게는 더 이상 이티 E.T. 스러운 매력은 없고 목청만 크다. 가장 애답게 잘 연기하는 이들은 맥스와 더스틴이다. 물론 아이들 말에 의하면 더퍼 형제와 숀 리비가 디렉팅할 때 분위기가 다르다는데, 이 때문에 연기차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핀 울프하드를 애정 하는 만큼 이런 말 하기 싫지만, 핀 연기 정말 못한다. 얼굴은 너무 퇴폐적으로 생겼는데 캐릭터가 단순 무식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얼굴로만 봐서는 밀리 바비 브라운이 마이크 역할을 하고 핀이 일레븐 역할을 해야 될 지경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12시이다. 뭘 봤다고 도대체 12시인지 이해가 안 갔다. 시간 순삭 능력은 예나 다름없었다. 내일은 7시에 일어나 9시 계절학기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한다. 그렇다면 더욱 부지런히 봐야 한다.
2. rainbow after rain
a. 잠깐의 휴식을 가진 뒤 돌아오니 스티브와 에단 호크와 우마 서먼을 똑 닮은 마야 호크가 손을 잡고 있다. 도대체 왜? 딱 봐도 레즈비언인데 말이다... 그리고 스티브는 여자 친구 없는 게 제맛이라고. 하지만 약 5시간 후, 아~ 역시. 스티브의 역할은 1. 잘생기고 2. 잘생긴 얼굴 망가지고 3. 여자친구 만들기 실패 이렇게 세가지로 고정돼야 옳다. 동이 틀 즈음에 스티브와 마야 호크는 짱친이 된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b. 윌 캐릭터도 정말 볼만하다. 시즌1부터 윌이 퀴어라는 설정이 텀블러에 의해 거의 기정 사실화되었지만, 그것을 퀴어 베이팅이 아닌 진짜 캐릭터 속성으로 반영한 제작진들을 칭송하고프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퀴어 베이팅이네 아니네, 제작진에게 배신감을 느끼네 마네 너 죽고 나 살자는 싸움이 많았는데, 이젠 호모가 나와서 불편하니까 안 보겠다는 트위터 쓰레기들에게 편승하지 않는 시리즈를 보자니 감회가 새롭다. 제작진들의 모럴 잣대가 더 강해진 것도 있겠지만, 모럴 잣대는 경제적 수익에 의해 움직이기 마련이다. 레즈비언과 게이들도 돈을 번다는 사실을 할리우드는 이제야 알았나 보다.
윌의 연기는 감독이 시킨 게 그만큼밖에 안돼서 시즌 후반부에는 필요할 때면 목 뒤를 긁적거리는 이상한 트리거 버튼으로 전락하지만, 초반에 윌이 현자 코스튬을 입고 마이크와 일당에게 실망감을 표하는 장면들은 이 시리즈에서 가장 건질만한 것 중 하나이다. 특히 비 내리는 배경으로 마이크와 윌을 역광으로 잡은 투샷은 내가 스크린에서 본 이미지 중 가장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뒤에 따르는 캐슬 바이어스 훼손은 좀 과하다는 생각은 든다. 부디 윌과 엘을 비롯한 아이들이 소리 지르는 것만이 좋은 연기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3. fat ass indiana cop
짐 호퍼는 모두의 최애 캐릭터이다. 호퍼 서장님이 있으면 슈퍼파월이 없어도 대충 나쁜 자식들은 원투펀치로 없애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안정감이 생긴다. 마치 모두가 앉고 싶어 하는 안락의자 같은 느낌... 심지어 서장님 옷도 안락의자 색이다. 호퍼의 매력은 짧고 굵은 데에서 오는데, 아쉽게도 호퍼의 폭력이 시즌 내내 길게 늘어진다... 폭력이 길게 늘어지면 늘어질수록 호퍼는 자신의 주먹과 맷집을 믿는 무식하지만 푸근한 아저씨가 아니라 액션 선도 예쁘지 않으면서 무지막지한 폭력을 전시하는 B급 액션 영화 조연 아저씨가 돼버린다. 감독들이 이번에는 또 터미네이터 레퍼런스를 넣고 싶었는지 아놀드 슈와제네거같은 인간이 계속 호퍼를 괴롭히러 온다. 정말 재미없고 키치하면 귀엽기라도 하지 그렇지 않아서 임팩트도 없다.
4. the guts and gore
<기묘한 이야기> 시즌1의 꽃은 데모고르곤의 정체를 알아내는 과정이었고, 시즌2의 꽃은 윌에 잠복해있던 데모고르곤 기생충의 발견이었다. 시즌1은 확실히 미스터리가 자아내는 공포가 강했고 시즌2는 윌이라는 아이가 돌연 괴물의 숙주로 변하면서 자아내는 언캐니, 기이함이 강했다면 시즌3에서는 고어 요소가 극대화되었다. 컬트 영화도 많이 안보는 주제에 이상한 말을 많이 썼는데 그냥 피랑 내장이랑 뼈가 많이 나온다는 말이다. 나는 공포영화도 안 보고 슬래셔 영화도 안 보고 고어물은 더욱 안 본다. 공포영화는 정말 내가 쫄보라서 못 보고 고어물도 <살인마 잭의 집>과 <미드 소마> 보고 나는 진짜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시즌3에서 쥐들이 바글바글 모여서 하나둘 내장과 뼈를 드러내며 터지는 것을 보면서 쾌락의 소리를 내지른 것을 보니 내가 이런 취향인가 보다. 쥐뿐만 아니라 후반부에서 호킨스 사람들 한 명씩 크리쳐 앞에서 쓰려지면서 오장육부 칵테일로 녹아내리는 것을 보는 것도 너무 흡족했다. 제일 별미는 아무래도 엘의 다리에 크리쳐의 지렁이가 꿈틀거리던 장면 아니까 싶다. 내가 비위가 이렇게 좋은지 몰랐다. 찰리 히튼 스크린 타임 부족할 때쯤 칼 들고 엘 다리 째주니까 얼마나 좋아요! 비위가 약한 부모님이 알려주지 않았던 헬게이트를 열어버린 느낌이다. 물론 오장육부가 터지는 모습이 약간 젤로나 슬라임 같은 B급스러움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진짜 고어 무비 팬들이라면 비웃을 수도...
여기서 내가 왜 <살인마 잭의 집>은 눈을 감은 상태로 영화의 1/2를 보고 <기묘한 이야기>는 눈 깜빡하지 않고 쭉 봤는지 생각해봤다. 잭이 사람들을 죽이는 끔찍하게 길고 많은 장면들에서 희열을 느낀 사람들은 부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근데 주요 캐릭터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가 느껴야 할 공포는 동등한 것 아닌가? <기묘한 이야기> 고어의 러블리함은 판타지물이고 호킨스 동네의 기이하지만 미국 신파적 우정과 사랑이 만들어낸 푸근한 분위기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미국 신파의 정반대인 잭이 70년대 미국 근교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여자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은 20대 여성으로서 나의 현실과 매우 닿아있는 것이고 거기서 관객이 대피할 수 있는 편안함이란 1도 찾아볼 수 없다. 여하튼 내장 파티 퍼레이드를 벌임으로써 <기묘한 이야기>는 시즌3을 기준으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이 앞만 보고 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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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 시즌3 (2019, 더퍼 형제)
7월 4일 시청, 7월 14일 리뷰.
일러스트: 심제희 https://www.instagram.com/jehee.r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