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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는 여자 의사 Nov 29. 2020

마당으로 들어간 여자






 나는 모성 신화에 대한 삐딱한 반감을 가진 채로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처음 품에 받아 든 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랑과 함께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는 수많은 증언들과는 달리, 내 머릿속엔 ‘아오 드디어 임신 끝났다. 퇴원하면 얼음 잔에 맥주 1000cc 원샷이다!’ 따위의 생각뿐이었다.  말린 자두처럼 쭈글쭈글한 신생아는 결코 처음부터 사랑스럽지 않았다. 열 달 동안 내 자궁 속 태반에 연결된 주제에 하루에도 수십번씩 억 소리가 나게 방광을 차대며 진상을 떤 세입자인 데다가 실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었다. 

 

 그럼에도 그 낯선 존재의 곁을 한 시도 떠날 수 없었던 건,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모성애가 폭발해서가 아니라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감으로 인한 불안 때문이었다.   

 그렇게 불안 속에서 하루를 버티고 버티다 보니, 어느덧 완모직수를 만 6개월가량 해내고 그 이후로 또 4개월을 이유식을 직접 만들어서 먹이고 있는 것이다. 

 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가끔 자는 아이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에 아득해진다.


 출산과 육아는 분명히 도취되는 경험이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 진행해 본 건 처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내가 하는 모든 선택들이 과연 오롯한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로만 채워졌는가에 대해서는 늘 의문이 남는다.


 분유와 시판 이유식이라는 아주 좋은 대안이 있음에도 굳이 체력을 고갈시키는 길을 택한 것, 직업적 능력치를 향상시켜야 하는 시기에 파트타임을 선택한 것, 등등 나는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수많은 포기를 저질러버렸다. 

 여고 여대를 졸업하고 자연스레 페미니스트로의 정체성을 갖게 된 나조차 ‘좋은 페미니스트’ 와 ‘좋은 엄마’ 의 양립할 수 없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다가 결국 둘 다 놓치게 될 운명 앞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얼마 전 아이의 동화책을 쇼핑하던 중「마당을 나온 암탉」이라는 예전에 영화 애니메이션으로 보았던 이야기를 동화로 다시 보게 되었다.

 난용종 암탉인 주인공 잎싹은 양계장에서 탈출해 마당으로 나가게 되지만, 그곳에서도 텃세로 쫓겨나고 더 위험한 숲으로 가 어미 잃은 청둥오리의 알을 품어 기르게 된다. 잎싹은 이 과정에서 엄청난 헌신과 희생의 모성애를 보여준다. 그리고 꽤 충격적인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초월적인 모성애가 주인공 잎싹만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의 보편적인 능력임을 보여주면서 대자연 어머니의 위대함으로까지 시선을 확장시킨다. 

 이전에 영화로 보았을 때는 어찌나 오열을 했는지 한동안 계란만 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이번엔 감상이 좀 달랐다.  


 암탉 잎싹은 당차고 긍정적인 여성 캐릭터로, 누군가로부터 부여받은 이름이 아닌 스스로 지은 이름을 갖고, 양계장의 난용종 암탉임에도 불구하고 알 낳기를 거부한다. 그 이후에도 죽음을 불사한 온갖 모험을 했지만, 결국 삶의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것은 모성의 초월적 자기 헌신이다. 

 철장과 마당을 나온 암탉이 왜 굳이 어미 잃은 청둥오리의 알을 품어야 했을까? 그냥 수달과 함께 숲을 구경하고 저 먼 나라까지 여행을 하면서 재밌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아니면 날기 연습을 죽어라 해서 최초로 날아서 바다를 횡단한 닭이 될 순 없었을까?


 충분히 페미니즘적으로 읽힐 수 있는 요소를 가진 이야기조차 끝내 모성애로 귀결되고야만다는 아이러니는, 내가 저지른 수많은 포기를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지게 했다.  

 이런 젠장,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포기를 해야만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닭이 아니다. 나는 다윈주의자이며 페미니스트이고 기회주의자이며 타협주의자이고, 무엇보다 영장류의 으뜸인 문명인이다.

 세라 블래퍼 허디의 「어머니의 탄생」에서 말하듯 ‘자기희생적 모성’은 실제 자연 세계에서는 너무나 특수한 경우일 뿐이다. 수 백 만년 동안 영장류의 어미는 수렵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를 데리고 다닐 수 있었고 그럴 수 없을 때에는 공동체 내의 타인이 대행 어미로 양육의 책임을 나누어가졌다. 하물며 자원이 넘쳐나는 현대 사회에서 출산과 양육이 생물학적 엄마만의 책임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한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는 한 여성의 힘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온 마을이, 온 세계가 도와야 한다.




 날아서 바다를 건너고 싶었던 꿈을 간직한 채 잠시 마당에 들어와 병아리를 기르고 있다. 마당에 다른 누군가가 내 병아리를 대신 돌봐준다면 날기 연습을 하러 숲에 다녀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옆 마당의 오리가 수영 연습을 하고 싶을 때, 내가 먼저 아기 오리를 돌봐주겠다 말 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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