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는 게 어때서, 이렇게 좋은데

by 잉여로운 백구인생

갑작스러운 육아 휴직 이후, 주변에서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이었다.


1. 무조건 지지한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시간을 온전히 즐겨라.

2.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지 않냐, 갑자기 육아휴직을 낸 만큼,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1번은 듣고 싶었던 말이지만 위로가 안 됐고, 2번은 맞는 말인데 듣고 싶지 않았다. 이 육아 휴직이라는 선택이 커리어에는 도움이 안 될지는 몰라도, 내 긴 인생에는 분명 약으로 쓰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기에.


일단 ‘나를 회복하고, 아이와 시간을 늘리자’는 두루뭉술한 목표 아래 선택한 육아 휴직인지라,

이 시간들을 상상만 했지 막상 어떻게 보내야 할지 스스로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등원시킨 뒤의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

둘째, 회사 일 말고 취미가 없었어서(회사 일이 취미란 얘기는 아님) 하고 놀 일이 없다.

셋째, 집에 있기 싫지만 갈 곳이 카페 밖에 없다.



그래도 육아휴직을 내니 좋은 점이 더 많았다. 주요한 장점을 추려보자면,


첫째, 아이와 여유롭게 아침에 장난치며 일어날 수 있고, 빨리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좀 줄일 수) 있다는 점.

둘째, 아침 햇살을 받으며 혹은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쓰고 장화를 신고 유유자적 아침 등원을 시킬 수 있다는 점.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민들레 홀씨를 후 하고 불어도 볼 여유가 생겼다는 점.

셋째, 지난 몇 개월 동안 시달렸던 불면증, 공황장애가 올 것 같은 두근거림에서 해방되었다는 점. 내가 잠을 이렇게 푹 잘 수 있었구나, 새삼 느끼는 요즘이다.

넷째, 월요병 완치. 일요일 점심 이후 해가 져갈 무렵부터 엄습해 오는 무기력함과 우울증에서 해소되었다. 밤늦도록 넷플릭스 정주행도 가능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뭐든 할 수 있다는 것.

다섯째, 평일 낮술 가능. 해가 머리 꼭대기 중천에 떠 있을 무렵 동네 벤치에 앉아 캔맥주 하나 까면 기분이 어떨까?라는 상상을 출장을 오가며 했었더랬다. 그냥 가능. 내일 당장 실천할 수 있음.


특히 좋은 건 내가 혼자서 노는 법도 알고, 돈도 쓸 줄 알 때 쉰다는 점이다.


그동안 범생이로만 살아왔던 내가, 호기롭게 그것도 여초 집단에서, 육아 휴직을 순번도 지키지 않고 써버리는 모난 행동을 감히 해버렸다. 그 용기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고 싶은 일들, 저지르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해보고 싶다.


육아 휴직 낸 게 '도망치는 거'라고 했던 사람들, 사실은 다 부러워서 그런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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