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우리는 독서를 배운다. 줄거리를 파악하고, 주제를 찾고, 작가의 의도를 추론하라고 배운다. 시험지에는 정답이 있다. “이 작품의 주제로 가장 적절한 것은?”이라는 질문 아래 다섯 개의 선택지가 놓이고, 그중 하나만 동그라미를 받는다. 우리는 그렇게 독서를 익힌다. 정답을 찾는 행위로.
이 습관은 오래 남는다. 책을 읽고 나면 ‘이 책의 주제가 뭐지?’라고 묻게 된다. 서평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찾은 주제가 맞는지 불안해서 남들이 쓴 서평을 슬쩍 본다. 비슷하면 안심하고, 다르면 불안해진다. 그러나 해석은 정답 찾기가 아니다.
『칼의 노래』를 읽고 “이 소설의 주제는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답은 하나가 아니다. 누군가는 ‘고독’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죽음’이라 말하며, 누군가는 ‘불가능한 충성’이라 말한다. 셋 다 맞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같은 산도 동쪽에서 보면 완만하고, 서쪽에서 보면 가파르다. 누가 맞는가. 둘 다 맞다. 산은 하나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 모습이 달라진다. 책도 마찬가지다. 고독을 본 사람은 이순신의 내면을 향해 시선을 보낸 것이고, 죽음을 본 사람은 노량해전의 최후를 향해 시선을 보낸 것이며, 불가능한 충성을 본 사람은 조정과 이순신의 관계를 향해 시선을 보낸 것이다.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시선의 결과물’이다.
시선은 어디서 오는가. 질문에서 온다. 정상을 향해 걷는 등산객과 야생화를 찾는 등산객을 떠올려 보자. 둘은 같은 산을 오르면서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정상을 향하는 사람은 능선과 거리와 체력 배분을 본다. 야생화를 찾는 사람은 길섶과 그늘과 습도를 본다. 왜 다른가. 묻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나?”라고 묻는 사람과 “이 근처에 야생화가 있을까?”라고 묻는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다른 것을 발견한다.
책을 읽을 때도 다르지 않다. 『칼의 노래』를 읽으며 “이순신은 왜 죽음을 각오했는가?”라고 묻는 사람은 이순신의 내면을 본다. “이순신을 죽이려 한 것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사람은 그를 둘러싼 외부 세계를 본다. 질문이 다르면 보이는 것이 다르고, 보이는 것이 다르면 해석이 달라진다.
서평이 비슷비슷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질문 없이 읽기 때문이다. 질문 없이 읽으면 책이 보여주는 것만 본다. 줄거리, 등장인물, 배경. 책에 이미 적혀 있는 것들. 그것을 옮겨 적으면 요약이 되고, 거기에 “감동적이었다!”를 붙이면 독후감이 된다. 서평은 다르다. 서평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질문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질문 하나면 충분할까. 질문 하나는 답 하나를 낳는다. “이순신은 왜 죽음을 각오했는가?”라고 물으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이미 삶 쪽을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답이 나올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다. 답이 나오면 질문은 닫힌다. 더 갈 곳이 없다.
하나의 질문으로 쓴 서평은 평면적이다. 시작과 끝이 있고, 그 사이를 직선이 잇는다. 논리적이고 명확하지만 깊이가 없다. 독자는 “아, 그렇구나.” 하고 끄덕인 뒤 돌아선다. 기억에 오래 남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서평이 대부분 그렇다. 하나의 주제를 잡고, 그 주제를 설명하고, 예시를 들고, 마무리한다. 틀린 구조는 아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다. 비슷한 책을 읽은 다른 사람도 비슷한 질문을 던지고 비슷한 답을 얻기 때문이다.
질문이 두 개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순신은 왜 죽음을 각오했는가?”와 “이순신의 죽음을 원하는 적은 누구인가?”. 첫 번째 질문은 안을 향한다. 이순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질문은 밖을 향한다. 이순신을 둘러싼 세계로 나간다. 방향이 다르지만, 둘 다 같은 인물, 같은 책을 향하고 있다.
두 질문에 따로 답하면 두 개의 평면이 생긴다. 하나는 이순신의 내면을 그린 평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를 둘러싼 세계를 그린 평면이다. 여기까지는 질문 하나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두 평면을 겹쳐보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내면의 이순신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죽여야 할 것들을 다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된 연후에 죽고 싶었다.” 외부의 세계는 이렇게 말한다. 왜군이 그를 죽이려 하고, 조정이 그를 죽이려 하며, 명군이 그를 죽이려 한다. 사방이 그를 겨냥한다.
두 그림을 겹치면 새로운 풍경이 보인다. 안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사람, 밖에서 그를 죽이려는 세계. 이순신은 이미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고, 세상도 그를 죽음으로 밀어 넣고 있다. 안과 밖이 공모한다.
여기서 깊이가 생긴다. 질문 하나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이를테면 이순신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완성이었다는 것. 그가 싸운 것은 왜군만이 아니라 삶 자체였다는 것. 거대한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무의미 자체를 살아낸 것이 그의 삶이었다는 것.
두 개의 눈이 입체를 만드는 것과 같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약간 다른 각도로 세상을 보고, 뇌가 그 차이를 계산해서 깊이를 만드는 것처럼, 서로 다른 두 개의 질문이 같은 책을 바라보고, 그 사이에서 깊이가 탄생한다.
아무 질문 두 개나 던진다고 깊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몇 쪽인가?”와 “저자는 몇 살인가?”. 두 개의 질문이지만, 이 사이에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겹쳐도 겹치지 않는다. 좋은 두 질문에는 ‘긴장’이 있어야 한다. 긴장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방향의 긴장이 있다. 안을 향하는 질문과 밖을 향하는 질문. 이순신의 내면과 이순신을 둘러싼 세계처럼, 두 질문이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
시간의 긴장도 있다. 과거를 향하는 질문과 현재를 향하는 질문. “주인공은 왜 그렇게 되었는가?”와 “주인공은 이제 어디로 가는가?”처럼, 두 질문이 시간의 다른 지점을 향하다가 어느 순간 교차한다.
주체의 긴장도 있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을 향하는 질문. “A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와 “B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가?”처럼, 두 질문이 서로 다른 사람을 향하다가 둘 사이의 관계에서 만난다.
핵심은 이것이다. 좋은 두 질문은 서로 다르되,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평행선은 입체를 만들지 못한다. 교차해야 한다. 그 교차점에서 해석이 태어난다.
“좋은 질문이 중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 질문은 어떻게 찾을까?” 당연한 궁금증이다. 4장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여기서 실마리를 던져둔다.
질문은 ‘불편함’에서 온다. 책을 읽다가 걸리는 곳이 있다. 이해가 안 되는 곳. 왜 이 인물은 이렇게 행동했을까. 왜 작가는 이 장면을 이렇게 썼을까. 왜 이 결말이어야 했을까. 매끄럽게 읽히는 책보다 걸리는 책이 오히려 좋은 서평을 낳는다. 걸리는 곳에 질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질문은 ‘나’에서도 온다. 이 책이 나에게 왜 중요한가. 나는 왜 이 책을 집어 들었는가.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무엇이 다른가. 책 바깥의 나를 책 안으로 끌어들이면 질문이 생긴다.
질문은 ‘맥락’에서도 온다. 이 책은 어떤 시대에 쓰였는가. 비슷한 주제를 다룬 다른 책과 무엇이 다른가. 책 하나를 고립시키지 않고 주변과 연결하면 질문이 생긴다.
지금은 이것만 기억하자. 질문이 시선을 만들고, 시선이 해석을 만든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개의 질문이 만나면 깊이가 생긴다.
다음 장에서는 두 개의 시선이 어떻게 입체를 만드는지, 그 원리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