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에서 입체가 만들어지는 원리를 살펴보았다. 두 질문 사이에 적절한 거리가 있어야 하고, 공통의 축이 있어야 하며,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야 한다. 이 세 조건이 갖춰지면 교차점이 생기고, 그 교차점에서 깊이가 태어난다.
원리를 아는 것과 실제로 적용하는 것은 다르다. 운전의 원리를 안다고 해서 바로 운전을 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원리를 몸에 익히려면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 이 장에서는 점선면 서평을 설계할 때 기억해야 할 세 가지 원칙을 다룬다.
점선면 서평에서 점은 첫 번째 질문이고 선은 두 번째 질문이다. 이 둘은 대등해야 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면 안 된다. 대등하다는 것은 분량이 같다는 뜻이 아니다. 무게가 비슷해야 한다는 뜻이다. 첫 번째 질문이 책의 핵심을 찌르는데 두 번째 질문이 지엽적인 것을 다루면, 둘의 무게가 맞지 않는다. 반대로 두 번째 질문이 무겁고 첫 번째 질문이 가벼워도 균형이 무너진다.
균형이 무너지면 ‘면’이 기울어진다. 교차점이 한쪽으로 쏠린다. 두 질문이 만나서 새로운 지평을 여는 대신, 무거운 쪽이 가벼운 쪽을 집어삼킨다.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쓴 서평과 다를 바 없어지는 것이다.
『칼의 노래』 서평을 다시 보자. 점은 “이순신은 왜 죽음을 각오했는가”이고, 선은 “이순신의 죽음을 원하는 적은 누구인가”이다. 첫 번째 질문은 이순신의 내면을 다룬다. 두 번째 질문은 이순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다룬다. 둘 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묵직한 질문이다. 어느 쪽도 다른 쪽의 부속품이 아니다.
만약 두 번째 질문이 “이순신의 갑옷은 어떤 형태였는가”였다면 어떨까. 첫 번째 질문과 무게가 맞지 않는다. 갑옷 이야기가 아무리 흥미로워도 이순신의 내면에 대한 논의를 받쳐주지 못한다. 면이 제대로 펼쳐지지 않는다.
대등한 질문을 찾는 방법이 있다. 두 질문을 각각 독립된 서평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지 확인해보는 것이다. “이순신은 왜 죽음을 각오했는가”만으로 서평 한 편을 쓸 수 있는가. 쓸 수 있다. “이순신의 죽음을 원하는 적은 누구인가”만으로 서평 한 편을 쓸 수 있는가. 역시 쓸 수 있다. 둘 다 독립적으로 서평이 될 수 있다면, 대등한 질문이다.
점과 선이 만나면 면이 생긴다. 그런데 면이 그저 점과 선을 나란히 놓은 것에 불과하다면, 점선면 서평의 의미가 없다. 면은 점과 선을 넘어서야 한다. 넘어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점만으로는 보이지 않고 선만으로도 보이지 않던 것이 면에서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1 더하기 1이 2가 아니라 3이 되어야 한다.
『칼의 노래』 서평에서 점의 답은 이렇다. 이순신은 삶 쪽을 이미 포기했다. 이기든 지든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선의 답은 이렇다. 왜군, 조정, 명군, 모두가 그를 죽이려 한다. 사면초가다. 이 두 답을 나란히 놓으면 무엇이 보이는가. 안에서도 밖에서도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것. 여기까지는 두 답의 합이다. 아직 넘어서지 못했다.
면의 답은 이렇다. 이순신의 삶은 거대한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지 않고 무의미 자체를 살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점의 답도 아니고 선의 답도 아니다. 두 답이 만나는 지점에서 처음 보이는 것이다. 안과 밖의 공모, 그 속에서도 매 순간의 싸움에 몰두하는 태도, 그것이 곧 삶이라는 통찰. 이것이 면이다.
면이 점과 선을 넘어서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서평이 두 부분으로 나뉘어 따로 논다. 전반부에서 이순신의 내면을 다루고, 후반부에서 이순신을 둘러싼 세계를 다루고, 결론에서 “이렇듯 안팎으로 힘든 상황이었다”라고 마무리하는 식이다. 두 질문을 던졌지만 교차시키지 못한 것이다. 점선면이 아니라 점 따로 선 따로다.
면을 제대로 만들려면 두 답을 겹쳐놓고 질문해야 한다. “이 둘이 만나면 무엇이 보이는가?” “점만으로는, 선만으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면이 완성된다.
점선면 서평은 점, 선, 면의 순서로 전개된다. 이 순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떤 질문을 점으로 삼고 어떤 질문을 선으로 삼을지는 서평 쓰는 사람이 정한다. 그러나 그 선택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점은 출발점이다. 독자가 처음 만나는 시선이다. 그래서 점은 독자가 따라오기 쉬운 질문이어야 한다.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는 질문, 혹은 책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과 연결된 질문이 점으로 적합하다.
선은 전환점이다. 점이 열어준 시야에서 방향을 틀어 새로운 곳을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선은 점과 다른 방향을 향하면서도 점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질문이어야 한다. 독자가 “아, 그런 시각도 있구나”라고 느끼면서 따라올 수 있어야 한다.
『칼의 노래』 서평에서 점이 “이순신의 내면”이고 선이 “이순신을 둘러싼 세계”인 것은 자연스럽다. 독자는 먼저 주인공의 마음속으로 들어간다. 이순신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이해한다. 그다음 시선을 돌려 그를 둘러싼 세계를 본다. 안에서 밖으로. 이 순서가 자연스럽다.
만약 순서를 바꾸면 어떻게 될까. 먼저 “이순신을 죽이려는 적은 누구인가”로 시작하고, 그다음 “이순신은 왜 죽음을 각오했는가”로 간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독자가 따라오기가 조금 더 어렵다. 외부 세계를 먼저 보여주고 나서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은, 밖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보다 무겁다.
순서를 정할 때 고려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면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이다. 면의 결론이 “이순신은 시대의 희생양이었다”라면, 외부 세계를 나중에 다루는 것이 효과적이다. 선이 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기 때문이다. 면의 결론이 “이순신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라면, 내면을 나중에 다루는 것이 효과적이다.
순서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유는 있어야 한다. 왜 이 질문을 먼저 던지는가, 왜 저 질문을 나중에 던지는가, 그 순서가 면의 결론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것을 의식하면서 설계해야 한다.
세 원칙을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 점과 선은 대등해야 한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압도하면 면이 기울어진다.
둘째, 면은 점과 선을 넘어서야 한다. 점과 선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둘이 만나야만 보이는 새로운 것이 있어야 한다.
셋째, 순서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어떤 질문을 점으로 삼고 어떤 질문을 선으로 삼을지, 그 선택이 면의 결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의식해야 한다.
이 세 원칙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점과 선이 대등해야 면이 제대로 펼쳐진다. 면이 점과 선을 넘어서려면 두 질문이 제대로 교차해야 한다. 순서가 적절해야 독자가 자연스럽게 면까지 따라올 수 있다.
원칙을 외울 필요는 없다. 점선면 서평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체득된다. 다만 처음 시작할 때는 이 세 가지를 의식적으로 점검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점과 선의 무게가 비슷한가? 면에서 새로운 것이 보이는가? 이 순서가 최선인가?
원칙은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처음에는 원칙을 의식하면서 쓴다. 점과 선이 대등한지 확인하고, 면이 점과 선을 넘어서는지 점검하고, 순서가 적절한지 고민한다. 이 과정은 어색하고 느리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면 몸에 배인다.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균형 잡힌 점선면이 나온다.
그 단계에 이르면 원칙을 벗어날 수도 있다. 일부러 점과 선의 무게를 다르게 가져가는 서평, 면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서평, 점-선-면의 순서를 뒤섞는 서평. 원칙을 알기 때문에 원칙을 깨는 것이다. 모르고 깨는 것과 알고 깨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지금은 원칙을 익히는 데 집중하자. 충분히 익숙해진 다음에 벗어나도 늦지 않다. 다음 장에서는 점과 선의 재료가 되는 질문을 어떻게 찾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