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보다 ‘상대관점’으로 시작된 사랑
저는 만약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만약이 허구일수도 있고
수수께끼의 열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만약은 다소 엉뚱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결과적인 존재, 그렇다면 원인자는 무엇일까?
어떻게 바라봐야 될까,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
무엇을 닮았을까?
바다일까, 산일까? 들일까, 꽃일까? 바람일까...
우리는 종종 창조를 ‘절대자의 유희’
혹은 ‘자기 영광을 위한 도구적 생산’쯤으로 오해하곤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전능함을 과시하거나, 찬양할 대상이 필요해서 인간을 만드셨다고 보는 시선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창조의 그림을 오롯이 ‘공급자 중심’의 틀 안에 가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의 입장이 되어 보니
아들딸이었을 때 입장과 또 다르게 세상을 보게 됩니더. 그러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보게 됐습니다
이것을 누군가를 낳게 되고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원인자의 입장에서 만약을 적용해 봅니다.
만약 세상의 원인자가 우주를 설계할 때
단 한 번도 '자기의 자리’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진짜 사랑은
어쩌면 언제나 상대의 입장에서 시작되는 사랑일지도.
부모가 아이를 위해 방을 꾸밀 때,
자신의 취향이 아니라 아이 손이 닿을 모서리,
아이가 넘어져도 다치지 않을 바닥부터 생각하는 것처럼 원인자도 인류라는 존재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인간의 시선, 인간의 필요를 헤아리며
우주의 집을 빚으셨을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처럼.
우리가 숨 쉴 공기의 농도,
딛고 설 땅의 무게,
그리고 시행착오를 허락한
‘자유의지’라는 위험하고 아름다운 틈까지
우리의 마음, 우리 입장에서 수없이 조정하고,
상상하며 모든 걸 배치하셨다면...?
이것이 제가 생각해 본 ‘창조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다 가지신 분이기에 자신의 전능함을
과시할 필요가 없었을 겁이다.
오히려 피조물인 우리가 스스로 살아가고,
진실을 깨치며 사랑으로 익어가기를 바라셨다면?
그래서 모든 열정과 정성을 다해 완벽한 환경,
그리고 스스로 ‘자라날 수 있는 자유’를 설계해 두셨던 거라면. 창조는 일방적인 명령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우리답게’ 살 수 있도록, 뒤에서 조용히 받쳐주는 한없는 배려와 사랑의 도면이 됩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이런 힘들고 번거로운 방식을 택하신 건지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사랑이란, 대상을 자기와 동등한 ‘주권자’로 인정할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노예를 만들려면 설계도 필요 없고 명령 하나면 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닮은, 성숙한 존재를 바라려면,
그 존재가 주체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
그리고 수많은 선택의 기회를 상대의 자리에서 내어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원인자의 일방적 시선에서
그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기대받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우리 삶의 결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절대자의 눈치만 보며 두려움에 떠는 존재가 아니라 닮아가는 존재가 됩니다.
오히려 원인자가 우리에게 건네주신 이 커다란 사랑의 운동장 위에서, 그분이 지녔던 ‘상대방을 향한 마음’ 배워가는 소중한 인격이며, 끝없이 성장하는 주체가 됩니다.
이제는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때입니다.
“나를 위해 우주의 시선을 바꿔주셨던
그 사랑 앞에, 지금 나는 누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그 질문에 조금씩 답을 찾아가는 인생 여정,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원인자를
조금씩 닮아가는 첫걸음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