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즈 라캥
아기의 오른손에 과자를 쥐어주고 또 하나를 주면 왼손으로 받아 쥐는 아기가 있는가 하면 쥐고 있던 것을 버리고 다시 오른손으로 받아 쥐는 아기가 있다. 나의 아기는 후자였다. 심지어 자기가 먹던 것도 '아' 하면 타인에게 줘버리는 무욕의 아기. 그 '순함'이 싫었다. 나는 탐욕스러운 아기가 좋았다. 과자를 거머쥐느라 하얗게 질린 손. 아 하면 훽! 고개를 돌리는 비정함을 욕망했다. 그 손이 있어야만 나의 부재로 인한 공간을 채워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어쩌겠어, 애미애비를 닮았는데.
《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번뇌하라. 깨달음에 이를지니.
에밀 졸라의 소설들은 자연주의를 표방한다.
자연주의 소설은 자연주의 철학적 사조를 바탕으로 19c말 프랑스 중심으로 전개된 소설 양식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예찬? 아니다. 인간의 본질을 자연 질서의 일부로 보고 유전적 기질, 환경, 본능의 영향 아래에 인간의 본질이 있다 여기는 사조다. 특히, 유전, 과학적 결정론적 사고.
졸라의 소설들은 비판받았다. 인간의 비참함만을 그려내고 전망 제시를 하지 않은 데다가 유전적 기질보다 개인의 본능과 환경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결국 과학에서는 멀어지고 얼핏 파멸만 강조된 듯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기질에 대한 연구라는 부제를 서문을 통해 내세우긴 했지만 '피와 신경'으로 치환되는 본능과 기질에 무게추가 있었다. 그런 모종의 이유들로 당시의 비평가들은 자연주의는커녕 통속적이라 비판했다.
또 하나 주목할만한 점.
졸라 이전의 소설들은 귀족들의 세계가 주를 이뤘다. 그 세계의 중심축은 피와 본능이 아니라 유전과 이성이다. 그들의 관점에서 졸라의 소설들은 천하고 비과학적일 수밖에 없다.
자, 그렇다면 소설에서 전망 제시가 필요한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과학적 관점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어떤 딜레마나 갈등, 악이 존재할 때 나의 사고와 정체성을 재정립하게 해주는 게 소설의 역할이다. 소설의 역할은 전망을 명확히 제시하는 게 아니라 현상 앞에 독자를 데려다 놓고 너는 어떻게 할 거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번뇌하는, 고뇌하는, 한 번밖에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의 역할이다.
예민한 테레즈. 다혈질 로랑. 이기적인 까미유.
다정한 속물 라캥 부인. 그리고 오로지 동물적 본능으로 목요일의 모임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생각한다.
기질은 변하는가. 변하지 않는가. 환경이란 얼마나 섬뜩한 것인가. 애초에 타고난 것이 환경으로 인해 변화가 가능한가. 그렇다면 자의든 타의든 기질을 바꾸려는 노력은 유의미한가. 기질을 변화시키는, 또는 바뀌었다 느끼게 하는 외부 요소들은 긍정적이어야만 하는가. 기질과 기질의 결합, 환경의 요소요소는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내는가.
테레즈 라캥을 모티프로 영화화한 박쥐 속 인물들의 이름이 흥미롭다.
테레즈는 태주로. 까미유는 강우로. 라캥은 라여사로 바뀌었다. 헌데 로랑만은 다르다.
현상현現象現 (현상 : 본질이나 객체의 외면에 나타나는 상)
앞서 밝혔듯 소설이든 영화든 예술의 역할은 우리를 현상 앞에 데려다 놓고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테레즈 라캥을 덮은 후 현상현 신부 앞에 당도한 우리는 질문을 받는다.
I didn't choose the blood that was transfused into me
현상이냐 본질이냐.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소녀의 기질에 분노를 느끼는 나는 무엇에 대한 집착인가 번뇌한다. 욕망하길 바라는 나의 욕망으로 파멸에 이를까 두려워한다. 선택이 두려워 주저한다. 욕망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마음을 괴롭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망하라.
괴로워하라.
그리고 번뇌하라.
뱀이 꼬리를 삼키듯. 태주와 상현이 서로를 마시듯. 무한의 굴레에서 찰나의 깨달음을 얻으라.
그러다 뜨거워진다면
맨발로 달려라.
● 도서 : 테레즈 라캥 - 에밀 졸라
● 영화 : 박쥐 - 박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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