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래는 지독한 암시를 건다

쇼미더여름방학3 | 우물

by 무화


냉장고를 열면 우물이 있다


군데군데 벗겨진 누런 잿빛 우물에는 차가운 수돗물이 있다 수돗물 위를 미끄러지는 밥그릇이 있다 밥그릇은 다회용이다

물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령이 붙어있는 문을 바라본다

하드부라보고잇다 먹어라


우편함엔 두 개의 편지가 들어있다 하나는 최, 하나는 김. 가명을 쓰는 무화씨는 두 개의 페르소나로 펜팔을 한다 이것은 유희다 반 친구들의 편지도 대신 써준다 그것은 거래다 소녀는 조숙함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단어를 수집한다 '거래'는 대기 중이다


너덜거리는 스크린 속 장만옥의 얼굴을 오래 들여다본다 까만 얼굴이 아름답다 콜라를 바른다 엄격한 빛에 얼굴을 내어준다 달콤한 꿈을 꾼다 후회는 늘 다가오는 시간에 유보된 채


2시에는 데이트가 있으므로 서두른다

김기덕 씨는 젠틀하다

Prince 보다

Richard Marx 보다

Paula Abdul 보다

Bobby Brown 보다

Martika 보다

쫀쫀한 영어를 발화한다 L에, R에, 온 세계가 들어있다 그와의 데이트를 위해 무화씨는 가끔 사전을 뒤적인다 나는 영어 잘하는 남자가 좋더라 난 못해야 해 용두산 공원에서 길을 묻는 고기 냄새 나는 외국인에게 진지하게 말한다 아이캔낫스피크잉글리쉬

콜라에 붙은 머리카락이 눈꼬리 끝을, 입술 아래 솜털을 건드리면 낮잠을 잔다 무화씨는 열네 살 봄에 154센티미터였으나 열다섯 살 여름에 168센티미터가 된다 고기는 먹지 않는다 꿈을 많이 꾼다 통통한 볼 대신 고뇌하는 패인 볼을 갖게 해달라 빈다 빌 신이 없으므로 그것은 늘 무효처리된다


비디오테이프를 밀어 넣고 포장마차우동을 끓인다 다시는 보지 못할 연인의 얼굴을 새기듯 탐욕스럽게 화면을 본다 천천히 먹어도 괜찮다 우동이니까

3일의 만남은 다음을 기약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만하다 대체로 지긋지긋하니까

책을 본다

책 속엔 시가 있다 공명하는 세계가 있다 미지의 친구가 있다

삼호 출판사의 천 원짜리 '대중가요'는 거룩한 양서다 엘리트는 될 수 없다는 걸 무화씨는 안다 그냥 안다 그냥이라는 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데이타를 냉소적으로 정리한 말이다 ‘그냥’을 입속에서 굴려본다


삐걱대는 창틀 위에 선다 찐득하게 녹은 나무 창틀에 텍스트를 음각한다

어떤 노래는 지독한 암시를 걸곤 한다


눈물 흘리지마 작은 골목 귀퉁이 꿈을 잊었다고

눈물 흘리지마 구름처럼 스쳐 간 허무한 것을

뭐라 말하지마 그 눈빛이 꺼질 듯 내게 속삭이네

뭐라 말하지마 하늘 저편 노을이 걸릴 때까지


노을에 볼이 탄다 우물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