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딱, 그것이어야만 하는 당신에게

by 무화



장조보단. 단조를

로맨스보단, 스릴러를

명도보단, 채도를

뾰족함을 거침을 부스스함을 카오스를,

화사한 밝음보단, 그늘진 어두움을, 그 속에 고이 자리하고 있는 명랑성


사랑해왔다.

어릴때부터의 취향이다. 기질적인 노란 발랄함속에 깊은 회색 우물이 존재하는 것을 멋있는것이라 여겨온건지도 모른다. 무언가 비밀스러운 것, 서늘한 헬싱키의 어느 고요한 숲 속을 걷다 묘한 냄새가 나는 버섯을 남몰래 캐내 입 속으로 던져 넣고 우물우물 씹는 일같은 그런.


은밀한 쿰쿰함이 키치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있어빌리티를 버리지 못하는 걸수도 있다. 근데, 바뀌지 않을 것이다. 지금껏 그게 나였으므로.


취향은 냄새를 맡는 일, 말하자면 어찌할 수 없는 감각의 영역이라 여겨왔다. 그런데 선택하고 추구하는 방향성 즉, 만들어 가는 것에 더 가깝다면.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숙고해야 하는 것' 이라면.


플랫폼에 맞지 않는 잡글을 흘리고 다니면서 얄팍한 고민(에 가까운 산파들)을 하는 요즘이다.

무릇, 읽는 자들이란 읽다 보면 쓰게 돼있고 , 그것은 생리현상과도 같은 화학적 작용을 하는 메커니즘인지라 지속적 인풋이 있을 땐 부지불식간에 매끈한 아웃풋이 나오는 경험을 하게 돼있다. 스스로도 음.. 이 문장 좀 괜찮네.

어떤 대의나 비즈니스나 지식인으로의 발로나 시대 정신을 실은 화차같은 거룩한 것이 아니더라도 결과물이 나오려 꾸물텅대는 마려운 상태에 봉착하면 이걸 어떤식으로든 내보이고 싶어지는거다. 나름 단어를 고르고 골라서.


문제는 양질이 아닌 정크 푸드를 읽고 싸지르는 것. 한 술 더 떠 배탈이 나 아무것도 먹지 못해도 인간은 배설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 대장균들의 사체. 대환장파티. 누군가의 말을 빌자면


공들여 만든 찬란한 똥.


텅 빈 공허한 똥. oh! bull shit

그렇다면 그것은 개소리 뿐.


나는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쓴 지는 더더욱. 뭐 거의 든 게 없다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쓰고 싶은 소극적이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열망을 가져버렸기에 쓴단 말이다. 근데, 이게 아무리봐도 '내 것'같지가 않다는 자각이 겨울 1호선 안 오리털 잠바 속 꾸룽내처럼 스물스물 올라 오는 거다. 해서...


한동안 거의 읽지 않았다. 때마침 읽을 수 없었던 시간들도 있었다. 이쯤되면 청순한 뇌로 리셋됐겠지 싶었다. 한 없이 아래로아래로 내려가던 어느 시점에 숨이라도 쉬고 싶어 슬그머니 긁적여 보았다.


두개골 속이 완전한 액체인것 처럼 이미지와 단어들이 둥둥 떠다니기만 했다. 잡아 당겼다 숨고르기를 하고 나면 다시 튕겨 들어 가 숨었다. 기껏 채굴하다시피 해 써도 착착착 실어 나올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하지 않았다.

컨베이어 벨트, 글의 구조를 만드는 밑작업. 그것이 읽기였던 것이다. 베껴 쓰든, 비틀어 쓰든, 구조ㅡ뼈대ㅡ를 만들기 위해선 문장을 읽고 읽는 중이어야만 한다는 것.


꾸역꾸역 쓴 걸 챗지에게 주고 비슷한 아취가 있는 작가가 있느냐 물었다.


"1번. 황정은 "


하, 요쉐키 봐라.

나의 취향이 드러나는, 내가 어떤 것을 훔치거나 베끼거나 추구한다는 것을 들켜버린 답이었다.

좋고도 싫은, 동시에 나는 결국 그런 사람이구나라는 앎. 추하고 불온한 회색에 매료되는 사람. 그것이 나라는 자각은 이런 사소한 일에서도 드러나는구나 싶어 웃었다.

뭐. 그런거지


아름다운 것, 예쁜 것, 나도 좋아한다. 심지어 집착한다. 그런데 내 미감은 좀 다르다. 앞서 구술한 바와 같이 대단히 쿰쿰하다. 그럼에도 최대한 덜 쿰쿰해 보이려 은밀하게 숨겨 쓴다. 나를 표현하고 싶기만 하다면 내 일기장, 습작 노트일뿐이므로 경계하려 한다.(비록, 실패가 더 많고)

나의 창작물을 어떤 브랜드라 가정했을 때 기능적 경험뿐 아니라 감정적 경험. 소통을 위한 여지를 남겨 쓴다. (요즘은 대단히 그렇지 않은 편이지만)

알았으면 하고 동시에 몰랐으면 한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쓴다. 업으로 두고 있지 않은 일반인이 창작을 하는 삶. 그것의 가치를 매기는 것 보다 스스로 그 행위를 즐기는 삶. 그것이 내 어두운 우물에 빛 한 줄기라도 내려주는 일이기를, 축축한 벽에 푸른 이끼 하나 라도 자라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그 이끼에 어느 날 꽃 한 송이 피어나는 생동을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이렇게 말하니 뭐 대단한 거 쓰는 것도 아니면서 깝치냐 할 수도 있겠다. 다만, 동기에 대한 작은 숙고다.


새로운 곳으로 옮겨 와 글을 발행하며 내 글을 좋아하고 소통하고자 느끼는 분이 있다면 그건 매니악한 분, 또는 확고한 취향을 가지신 분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엊그제 처음 댓글을 받았다.

뭐지? 미쳤다! 라고 하셨다.

좋았다. 나는 도른자, 미친 인간이므로.


요즘 읽는 중인 <불안의 서>

A24영화들에 환장한다. 그 영화들처럼

어두운 하위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사람.

대중성보다는 취향을 가진 사람.

대중성보다는 개성, 거칠고 불편한 어두움의 응시를 즐기는 사람을 좋아한다.


열광할 수 밖에 없는 열 명의 팬, 아니 한 명의 팬만 있어도 우리는 창작을 할 수 있다. 팬덤이 확장되면 그 불편하고 거칠고 뾰족한 개성이 대중성으로 변모할 수 있다.

그 취향ㅡ개성ㅡ쿰쿰한 지하 세계를 지속적으로 만들어 가려면 어떤 질문들이 필요한가. 업으로 삼겠다면 숙고에 숙고에 숙고가 필요할 거다.

난 아니니까 간단한 숙고면 된다.

거 참 말 안되네.

운과 틈새 시장은 제끼고


결국은 감정적 경험을 위한 소통만이 필요하다.




당신은 너무 예민하고 까다로워


나는 섬세하고 고집스럽다. 그래서 선택지가 적다. 대신 딱. 그것만 충족되면 다른 건 상관 없다. 오히려 선택지를 고르는 수고로움을 좁혀 준다.


취향을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자신만의 B급 프레스티지를 지키길 바란다.

이건 내가 내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A24영화흥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