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수수밭
유월의 어느 날.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표어를 쓰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를 단체 관람했다. 철저히 학습된 사상과 공포와 울분에 휩싸여 이승복의 입을 찢은 괴뢰군들이, 인간으로 정의 내릴 수 없던 그들이 두려워 몸을 떨었다.
다비드 칼리의 그림책 <적>에서 적은 꼬리 달린 악마다. 이분법속 북쪽의 생명들은 이렇듯 모조리 짙은 야만으로 뭉쳐진 惡인 줄로만 알았다. 분기탱천한 아이들은 그들만의 언어로 북한군을 희롱했다. 그러나 길지 않았다. 거대했던 울분은 사라지고 몹쓸 잔상만이 남게 되자 다음 타깃은 소년이 되었다. 나는 콩사탕이 싫어요. 우스갯소리로 소비되는 그 소년을 떠올리며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안도했다. 나는 그 소년이 아니었고, 나의 세계에 악은 존재하지 않았고, 내 어설픈 이념은 굳건했으니까. 붉은 해가 질 때 가슴에 얹던 손에는 전에 없던 힘이 들어갔으니까. 근데 어떻게 그렇게 하지? 나의 호기심은 구체성을 띠었고 상상력은 그 소년의 입을 다시 찢었다. 두 번 세 번, 아니 몇 번이고 찢고 죽였다. 잔혹한 상상력을 떨치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야만의 시절이었다.
《붉은 수수밭》 모옌
문화 대혁명을 통과한 모옌에게 중국은
'원시적인 생명력이 충만한 인간'들의 거대 집합체다. 그 생명력은 몹시 야만적이고 격정적이며 순수하다.
'순종(純種)'의 인간으로의 회귀를 갈구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붉은 수수밭>. 마지막 구절을 읽고 나면 적잖이 혼란스러워진다. 소용돌이치듯 산란스러운 이야기의 흐름에서 겨우겨우 앞으로 나아간 나에게, 우리에게 모옌은 무엇을 전달코자 했는가?
얼핏 이 작품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중국 산둥성 가오미 지방을 배경으로 일제의 만행에 대항하는 민초들의 이야기를 담은 것처럼 보인다.
붉은 수수로 형상화되는 민초들의 이야기.
국공전, 대약진 운동을 지나 문화 대혁명의 시대로 치달았을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일본군의 만행, 그 만행을 응징하는 또 다른 악에 대한 이야기.
천명관의 <고래> 속 춘희 같은 여장부 다이펑렌과 대미를 장식하는 작은 할머니 롄얼의 기묘한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이 많은 이야기들이 시간순으로 서술되었다면 그 어떤 흥미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가족사의 테두리 안에서만 서술되었다면,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서술되었다면 어쩌면 영원히 손가락질받는 망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모옌은 태어나지도 않은 손자의 시점으로 거대한 역사의 질곡을 생생히 보도하듯 묘사하며 시간을 넘나 든다. 시간과 시간은 겹쳐지고 야만의 시대는 신화처럼
에로스와 로고스를 품는다. 중국 역사의 잔혹함과 부조리는 신화라는 외투를 걸치며 <곡성>의 효진처럼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뭣이 중헌디?
화자가 복원하는 가족사는 ‘종(種)의 역사’다. 그 종의 역사 속에는 붉은 수수로 만든 고량주가 흐른다.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토템으로서의 붉은 수수는 영웅적이면서 또한 가장 개자식인 인간들의 배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넘친다. 잡종 수수의 포위 속에서 순종이 되기를 열망하는 화자의 절규가 인간과 역사가 폭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부끄러운 기록들임을 증언하고 고개 숙이고자 한 반증 같은 것이었다면 노벨 문학상 선정단의 혜안에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짙은 파토스가 그 원시적인 생명력에만 천착되어 나온 것이라면.
나는 아주 정성 들여 비난을 퍼부을 것이다.
그리고 내 야만의 역사 속 주인공에게 뒤늦은 사과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실이건 아니 건간에.
● 도서 : 붉은 수수밭- 모옌
● 영화 : 붉은 수수밭- 장이머우
Cinema Reading Enjoy Artistic
Moment 크림북클럽 2024년 4월
한강작가의 아버지 한승원의 <야만과 신화>가 떠올라 재독 했다. 작가의 말이 새삼 인상적이다.
깨어 있는 자만이 우주와 소통할 수 있다. 문학은 우주와 소통하기의 일환이다.
삼체의 예원제가 야만의 세계를 관조하며 우주의 생명체가 아닌 문학과 소통했다면 어땠을까. 자기의 절대 고독은 자기 자신만이 짊어지고 가는 것이거늘.
영화 <삼체>가 류츠신 《삼체》의 시작인 것처럼.
영화 <붉은 수수밭>은 소설 《붉은 수수밭》의 프롤로그에 불과하다.
시간을 거스르는 야만과 신화의 끝에 가닿아보기를 권한다. 자문하기를 바란다.
무엇이 중요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