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

파리 대왕

by 무화

사납다.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비문이 난무하고, 오역과 고어古語가 장벽을 친다. 실소가 터져 나오는 문장의 세레나데가 근처 산책로 개똥만큼이나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매혹적이다.



전율이 느껴진다. 작중의 사이먼저럼 일순간 혼미해지기까지 한다ㅡ심지어 공포의 극한에 맞닥뜨리는 순간 펼쳐지는 오만하고 얄미운 자연 풍광에 아연실색한다ㅡ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 했다는 골딩의 거창한 주제 의식 때문이 아니다. 지금도 도처에 산재하는 무질서한 idㅡ부패 / 타락 / 파괴 / 히스테리 /공포ㅡ를 아득한 과거의 어린 소년들로도 충분히, 너무나 쉬이 알아채게 해 준다는 점에서다. 굳이 선택해야 한다면 성악설에 무게를 두는 나는 흥미롭게 읽을 수밖에.



《파리대왕》 vs 《Human Kind》


이상하게도 우리 자신의 죄 많은 본성을 믿는 것은 우리에게 일종의 사면을 제공한다. 만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쁘다면 참여와 저항은 노력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선하다고 믿는다면 왜 악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가져야 한다. 이는 참여와 저항에 가치가 있음을 의미하며, 행동할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휴먼카인드 8장 <스탠리 밀그램과 전기충격 실험> 중에서



이번 독서의 목표는 성선설과 성악설 그 사이에 있는 소년들을 관찰하고,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찰 비슷한 것을 하기 위함이었다. 부러 대척점에 있는 책을 함께 읽었다. #휴먼카인드 의 저자 브레흐만은 인간의 본성은 악이 아님을 실제 사례를 가져와 보여주며 조목조목 반박해 왔다. 그러나 근거를 제시해 나가는 선한 본성의 역사를 병행해 읽으면서도 나의 뿌리 깊은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과연, 과연, 과연? 방황하던 물음표는 결국 다른 곳에 가 찍혔다. 본성이 아닌 본능. 본능은 너무나도 쉽게 변질되므로.



대관절 파리대왕은 무엇이란 말인가?


소년들이 뒤로 바싹 다가갔을 때 암퇘지는 화려한 꽃이 피어 있는 공지로 들어섰다. 거기에는 나비들이 서로의 주위를 날고 있었으며 , 무더운 대기가 조용히 깔려 있었다. 여기에 더위에 녹초가 된 암퇘지는 쓰러졌다. 소년들은 마구 덤벼들었다. 이 미지의 세계로부터의 무시무시한 습격에 암퇘지는 미친 듯이 날뛰었다. 비명을 지르고 뛰어오르고 했다. 잭은 암퇘지를 올라타고 창으로 내리 찔렀다. 창은 조금씩 속으로 밀려 들어가고 겁에 질린 암퇘지의 비명은 귀가 따가운 절규로 변하였다. 이어 잭은 목을 땄다. 뜨거운 피가 두 손에 함빡 튀어 올랐다. 밑에 깔린 암퇘지는 축 늘어지고 소년들은 나른해지며 이제 원을 풀었다. 나비들은 여전히 공지 한복판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고 있었다. 202)



순수와 순결을 단번에 잃어버리는 이 향연은 작품의 전환점을 명확하게 시사하는 지점이 된다. 설핏 동경하지만 좌절된 상식의 세계이므로 영원히 돌아갈 수 없는 에덴동산을 의미하는 듯도 하고, 오이디푸스의 <혼야>라는 해석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며, 순수를 잃는 게 아닌 비순수를 획득하는 지점이라 할 수도 있어 묘하게 읽힌다. 굉장히 에로틱하고 동시에 섬뜩하다. 그렇다면 본능을 악이라 규정짓는 이성은 어떤 잣대를 가져야 할까.


물가를 걸어가다가 홀연 깨달아지는 바가 있어 그는 놀랐다. 이승의 따분함을 깨우친 것 같았다. 이승에서의 모든 도정은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며, 세상살이의 태반은 발걸음을 조심하는데 보내지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110)


성애의 장면과도 같은 살육이 끝난 후 암퇘지의 머리는 제물이 된다. 그 후 대장도 사냥꾼도 지략가도 아닌 사이먼ㅡ순교자ㅡ에게 머리는 진실을 설파하며 자신이 짐승(두려움)이고 악이며 곧 자연임을, 태고적부터 있어 온 인식임을, 또 심연임을 인지시킨다. 파리들 중의 파리가 아니라 파리가 숭상하고 폭압하고 약탈하는 존재.. 즉 대자연이 파리대왕이며 절대 악이 된다. 이러한 어리둥절한 아이러니는 애초에 두려움ㅡitㅡ은 각자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났으며 '내'가 '너희들'의 일부이므로 설명 가능해진다. 왜 악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지 질문하는 매개로서 골딩의 <파리대왕>은 가치를 지닌다.



탐욕스럽고 도리를 모르는 자연 '아가리'.


술책에 능한 가면 뒤의 소년들.


그 보다 더한 폭력의 세계로 인도하는 구원자.



누가 파리대왕이란 말인가. 아니...



무엇이 파리대왕인가.



도서 : 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영화 : 파리 대왕 1963 - 피터 브룩





2023년 12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