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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푸치노 Dec 20. 2021

죽음과 맞바꾼 자존심

정확히 11년 전 일이다. 아침에 사무실에 들어섰는데, 여느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웅성웅성하고 있었다. 당시 사업부장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처음에는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다 다쳐서 그렇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그의 죽음의 원인은 극단 선택이었다는 것으로 정정되었다.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에 사시던 그분이 술병을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는 장면이 CCTV에 찍혔다는 얘기도 들렸다. 그분이 우리 사업부로 부임하신 지 두 달쯤 되었던 때였다.


그 일이 일어나기 5년쯤 전에 우리 회사는 앞으로 커질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우리의 포부에 비해 우리의 기술력이나 사업에 대한 이해도는 형편없었고, 좀처럼 사업은 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강한 경쟁사를 타도하겠다는 목표를 해마다 외쳤지만, 우리의 존재는 경쟁사의 발꿈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새로 임명되는 사업부장들은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되곤 했다. 그리고 그해 초에 회사 내 다른 사업부에서 두각을 나타내시던 그분이 새로운 사업부장으로 임명되셨다. 회사 내에서도 기술력이 뛰어나고 인품이 좋기로 유명한 분이었다. 그분은 처음 사업부 관련 보고를 받으시는 자리에서부터 연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셨고, 그분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져 갔다. 그 일이 있기 전날에는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시는 그분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 걱정스러웠다는 말도 들렸다. 물론 그분의 극단 선택의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여러 가지 정황상 회사일에 대한 중압감 때문 아니었을까, 그렇게 짐작할 뿐이었다.


그때 당시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의문은 '그렇게 힘드셨으면 차라리 그만두겠다고 하시지. 왜 그 말을 못 했을까'였다. 이미 상당한 경제력을 갖고 계신 분이었고, 굳이 회사 생활을 하지 않으셔도 사는 데 무리가 없는 분이었다. 그런 분이 왜? 그러나, 조금 더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점차 그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힘들어서 못하겠다는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대통령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로 굉장히 힘든 자리일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일이 자기 예상보다 더 힘든 것 같다고, 능력이 부족한 것 같다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을까? 그 말이 하기 힘든 이유는 그간 자신이 쌓아온 명성, 평판, 다른 사람들의 기대감 등 한마디로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기가 힘들기 때문일 게다.


최근 몇 년 동안 유명한 정치인들이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극단 선택을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살아서 그간 쌓아온 이미지를 무너뜨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남겨두고 싶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가진 게 많은 사람일수록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내려놓는 게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그분이 그토록 염려하며 힘들어하셨던 사업은 다행히 11년이 지난 지금은 많이 성장했고, 제 궤도에 진입한 상태이다. 이 사실이 멀리 계신 그분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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