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학생인 아들 학교 공개 수업이 있었다. 학급 대표 엄마는 공개 수업 전에 근처 카페에서 커피 모임을 하면 어떻겠냐는 카톡을 보냈다. 많은 엄마들이 커피 모임에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표했다. 나는 공개 수업에는 참석할 예정이었는데, 엄마들의 커피 모임에는 참석을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50대에 중학생 아들을 둔 나이 많은 엄마이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많이 늦은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아들이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들 친구 엄마들과의 모임도 시작되었는데, 나는 역시나 엄마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대부분 나보다 여섯일곱 살은 어렸고, 열 살 이상 훌쩍 차이나는 엄마도 있었다. 엄마들 모임에 참석하면서 나이 많은 엄마라서 자꾸만 주눅 드는 나를 발견했다. 글쎄, 나이 많은 엄마라서 느껴지는 이 위축과 부끄러움의 정체는 무엇일까?
드라마나 신문 기사에서 아이들이 나이 많은 엄마가 학교에 오면 부끄러워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유독 젊고 예쁜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도 들렸다. 비교 대상이 없는 집에서야 상관없지만, 여러 엄마가 함께 모인 경우엔 아들이 나이 든 엄마를 부끄러워 하진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어느 모임에서든 평균에 속해야 마음이 편한 법인데, 나는 평균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고, 그 자체가 스트레스였을 수 있다.
남들에 비해 늦은 나이에 아들을 낳고 키우면서 이런 별 것 아닌 일에도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힘든 점도 많았지만, 나이 많은 엄마라서 느끼는 분명한 장점도 있었다고 믿는다. 아들을 키우면서 나는 어느 엄마보다 더 행복했다고 생각한다. 아들을 갖기 전에 한차례 유산을 겪었고, 나이도 많았기에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엄마가 되고 나서 나는 늦게 얻은 아들이 내 인생의 커다란 선물 같았다. 내가 어린 나이에, 별 어려움이 없이 아이를 갖게 되었다면 나는 아이가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아이는 내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라 그야말로 선물이었다. 당연히 받는 월급이 아니라 기대치 않은 보너스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아들을 키우면서도 그 마음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들에게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그저 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만을 바랐다. 참견하고 잔소리하기보다,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들이 실수하고 잘못해도 충분히 사랑한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행복감이란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이다. 어려움 없이 숨을 쉬는 것도, 휴일 오후 집 근처를 산책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만,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소망일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알 때 행복을 느끼게 되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별 것 아닌 일에 고민이 길어졌지만 나는 엄마들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 다행히 서로의 나이를 묻는 어색한 질문들은 오가지 않았고, 대부분 처음 만나는 사이였지만 아이들 얘기를 하며 신나게 웃고 떠들었다. 유치원 엄마들 모임 때에 비해 다른 엄마들도 나이를 더 들어서 그런 건지, 겉으로 보기엔 나만 너무 늙었다는 느낌도 크게 들지 않았다. 이제는 더 당당해지고 싶다. 나이 많은 엄마라도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