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의 첫 번째 이야기 : 솔직히 드라마는 자신 없었다.
어릴 적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들은 거의 방송 실시간으로 만들어졌다.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결말이 바뀌기도 하고,
조연이었던 배우가 인기가 많아지자 갑자기 주연이 되기도 했다.
쪽 대본이라는 것이 있었고 연예정보 프로그램에선 배우들이 며칠을 밤샘으로 촬영했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와.. 저게 가능하다고? 작가님들 진짜 대단하다...!!'
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드라마는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두도 나지 않았다. 내가 감히? 드라마를? 싶었다.
소위 말하는 대사빨이 좋은 것도 아니고
밤새 글을 쓸 체력도 안되고
무엇보다 시간에 쫓기면서 받을 엄청난 스트레스..
내가 얼른 대본을 줘야 촬영을 할 수 있잖아?
방송 펑크 나면 어쩌지?
하는 기타 등등의 엄청난 압박감은 감당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과거 시나리오 작가의 현실은 더 참혹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시나리오 작가 이야기 할 때 할 예정이다)
(아! 김호연 작가님의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의 이야기를 보는 게 더 나으실지도..)
물론 현재는 표준계약서도 있고 여러모로 많이 나아졌지만,
만들고 싶은 작품의 시나리오를 직접 쓰는 감독님들이 많기 때문에
전업 시나리오 작가는 영화의 분야에서 만큼은 힘이 좀 없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시나리오 작가를 꿈꿨다. (참 현실감각 없었네..)
내가 시나리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백이면 백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시나리오 작가는 힘없어. 작가는 드라마가 낫지"
"드라마 써"
"영화 하려면 감독해야지"
그러나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따로 있었다.
어느 자리에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어느 작가님을 만났다.
그분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시다가 드라마 작가로 계약하신 후였는데..
내가 시나리오 작가를 하고 싶다고 하니.. 무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지금 드라마 작가로 내가 신인이라 최하의 대우를 받고 있거든. 근데 그래도 시나리오 작가 때 보단 훨 나아"
아...
정말 그렇군요..
그래서였을까?
드라마는 자신 없지만 그래도 뭔가 꼼지락 거려보긴 했다.
몰래 단막극 공모전에 작품을 내보기도 했고 방송 아카데미 드라마 기초반도 수료했다.
공모전은 당연히 늘 떨어졌고 최종심에 오른 적도 없었다.
방송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깨달았다.
나는 시나리오를 잘 쓰기 위한 100분에서 2시간의 흐름에 이야기를 채워놓는 훈련을 했고
고심하고 고심해서 글쓰기 방식을 가졌고 대사도 잘 쓰지 못했다. (이것은 여전히 나의 부족한 점 같다)
영상.. 앵글.. 인물의 동선과 공간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글을 쓰는 나의 호흡은
드라마랑 맞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이지 드라마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시나리오보다 드라마 대본을 더 많이 읽었다.
그 사이 시간이 흐르고 많은 변화가 생기면서
드라마도 사전제작의 분위기가 자리 잡았고
OTT 가 등장하면서 드라마도 영화처럼 대본을 거의 다 쓰고 촬영하는 환경이 왔다.
영화를 하던 스태프들도 드라마를 하기 시작하고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음을 느끼던 그 시기에
나는 시나리오 작가로 돈 못 받고 쓴 시놉시스들.. 트리트먼트들이 넘쳐났고
극본료를 어떻게든 적게 책정하거나
영화 촬영이 들어가면 주겠다는 계약서 조항들에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다.
그러던 중, 나의 시나리오가 맘에 든다고 만난 피디님이 웹드라마를 제안해 왔다.
"제가요? 웹드라마요?"
"네.. 웹드라마라 분량도 20-30분 정도고.. 사실 저희가 미리 준비하던 작가님이 계셨는데
사정이 생기셔서 중간에 그만두시고.. 새로운 작가님을 찾고 있거든요."
"아.. 네... "
"힐링물이라.. 작가님 시나리오 보니까 잘 맞으실 거 같아서요. 그리고 전에 작가님이 너무 어리셔서..
좀 나이 있고 이래저래 경험이 많은 작가가 좋겠다고 내부에서 의견이 나왔습니다."
"아 그렇군요. 제가 경험이 많긴 하죠"
"네. 그럼 저희 기획안 보시고 얘기 나눠 보시는 거 어떠세요? 대본도 다 나온 상태에서 촬영할 계획입니다."
솔깃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고
웹드라마라면.. 좀 그래도 배우면서 시작하는 단계로 괜찮지 않을까?
게다가 나의 글쓰기도 많이 변화하고 있었다.
다양한 장르를 쓰고 또 써보고 훌륭한 대본들을 읽고 또 읽고.. 필사도 하면서 노력했고
그 결과 글의 스타일도 대사 위주로.. 가볍게 변화하고 있는 느낌이 들던 차였다.
그래서 기획안과 전체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유출하면 안 된다는 약속과 함께
받아서 읽어 보았고 솔직히 내가 물불 가릴 처지는 아닌 데다
힐링물은 워낙 좋아하는 장르라 무조건 할 생각이었는데...
다시 만난 자리에서 들은 세부사항들은 좀 충격이었다.
우선 페이가 말도 안 되게 적었다.
근데 그 페이마저도 제때 받을 수 없고 3개월 내로 4부까지 대본을 써서
마음에 들면 정식 계약을 하고 극본료를 주겠다고 했다. (촬영이 아니라 이젠 맘에 들면?)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 누구 마음에 들어야 하느냐?
이 웹드라마를 하고 싶다고 제안한 남자주인공 배우 맘에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주인공 배우님과 회사 피디님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번씩 대본 회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 대본을 위해 같이 회의를 해서 개발하는 건 오케이!
근데 나머지들은..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는 3개월이지만.. 전부 다 새로 써야 할 상태인데 얼마나 걸릴지도 확실치 않았다.
아니 솔직히 3개월도 부족할 거 같았다.
근데 페이를 받을 수 있을지 정식 계약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주일에 한번씩 회의를 통해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집에가서 난 또 수정하고 대본을 뽑기 위해 고민한다...
돈을 못 받으니까 다른 알바라도 해야하는데 현실적으로 어렵겠네. 그럼 월세는 어떻게 하고?
아.. 전에 작가님이 왜 그만두신지 알것만 같은데..
기가 막혔지만 애써 담담한 척 물었다.
"음.. 여러가지 사항들이 좀 걸리는데.. 그래서 제가 얻을 수 있는 건 뭔가요?"
그랬더니 피디가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배우님이랑 회의를 하실 수 있죠. 친분도 쌓을 수 있고"
"그 배우님이 누구신데요?"
"그건.. 미리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참나,
욱- 순간 화가 올라왔지만 그간 쌓인 내공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미소 지으면서 제가 하긴 어렵겠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좀 씁쓸했다.
피디 말대로 나이가 있는데 입봉 못했는데 거절해도 괜찮은 건지..
내가 필력이 뛰어난 것도 아닌데 거절한 게 맞는 건지..
미련스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휴.
(미리 예고하자면, 저 미련함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꼬리표가 된다)
그나저나 그 남자 배우는 누구였을까?
아직도 궁금하다.
덧,
이건 시작한 것도 아니랍니다.
웹드라마를 제안받았던 일은 심심풀이 땅콩 같은 수준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