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아이가 첫째 아이의 물건을 만지며 놀고 있을 때 가만히 보기만 했다. 망가지면 분명 첫째 아이가 속상해할 거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스쳐갔을 뿐 단순하게 셋째 아이가 만지며 가만히 놀고 있음에 만족했다. 잘 가지고 논 다음 넣어놓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아이가 화난 데에 나도 일조했다 생각하니 미안했다. 미안한 마음에 더 아이가 화를 내는 모습을 가만히 보지 못한 듯하다. 셋째 아이를 말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감추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아이 물건 중 하나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에게는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에 아이의 물건도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한 때 지나가는 취향의 일부분일지도 모르지만, 그 나이를 상징해 주는 하나의 물건이니 그때를 소중하게 다뤄주고 싶다. 어린 시절의 나는 나만의 공간도 없고 취향도 몰랐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 내 길을 찾아가는 데 헤매었다. 나는 아이들이 자라나는 순간순간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도록 해주고 싶다.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독립해 가는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무엇을 잘하고 좋아하는지 확실히 알면 좌절을 극복하는 데 어려움이 적을 거라 생각한다.
아이가 울먹이며 "나보고 참으라고?" 말했을 때 아이의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마치 어린 시절 울먹이며 소리를 지르던 나와 마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울먹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지만 아이 내면의 단단함이 느껴져 반가웠다. 나는 피하고만 싶던 내 모습과 마주하는 용기를 갖게 된 것 같아 나 자신이 대견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또 화를 내는 첫째 아이를 보게 되었고, 그 모습에 또 화를 내었지만 아이와의 다툼으로 아이와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이의 하교시간에 맞추어 학교 앞으로 가 아이를 기다렸다. 핸드폰을 보며 계단을 내려오던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옷차림새부터 변해버린 아이를 보니 어색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어색함을 깨보려 아이 팔짱을 끼었다. 아이도 어색한지 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엄마는 같이 팔짱 끼고 손잡고 싶은데"라고 말하며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도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귀엽고 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쉽기도 했지만, 그 마음은 그대로 놓아둔 채 성장해 나가는 아이와 손을 맞잡으려 한다. 어린이에서 청소년의 시기를 맞은 아이에게 유아 때와 같은 친밀함을 기대해서는 안 되겠구나. 아이의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겠음을 다짐하게 된다.
커가는 아이를 보며 서운함을 느낄 때, 속상하다고 침잠하지 않도록 나에게 집중하려 한다. 나도 나만의 공간과 세계를 만들며 '나'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글을 쓴다. 엄마는 엄마대로 자신의 재능을 가꿔 나가다 보면 아이도 아이만의 세계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취해 나갈 것이다. 각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통해 서로의 근황을 나누며 응원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부모와 자녀는 함께 성장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