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를 출산함과 동시에 임신 중 참여했던 자격증 수업이 마무리 됐다. 아이를 낳고 한 달 여가 지났을 즈음 공부했던 부모교육코칭전문가 2급에 이어 1급을 시작했다. 밤낮의 구분 없이 아이를 온종일 돌봐야 했던 때 자격증 협회의 단톡방에 1급 과정에 대한 내용이 올라왔고 내 마음이 움직였다. 아이를 돌보는 것 외에는 나 자신에 대한 계획이 없었지만,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던 학업에 대한 욕구가 다시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 앞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내가 함께 공부하는 분들에게 나의 생각을 말하려니 긴장되어 목소리가 떨렸던 기억이 난다. 공부 내용을 정리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발표하고 토론하게 되는 공부로 나 자신을 표현하게 되었다. 공부를 하며 협회 카페에 과제를 올려야 했다. 과제를 올릴 때마다 대표님은 구체적이면서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해주셨다. 대표님의 피드백은 내 가슴을 울리게 했다. 문단도 제대로 나누지 않아 읽기 힘든 글이었음에도 글이 생생하게 읽힌다고 칭찬해주셨다. 솔직하면서도 섬세한 표현력을 갖고 있다는 피드백에 가슴이 뛰었다.
1급 과정이 시작되면서 협회에서는 공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어린 아기를 돌보며 글을 쓰는 것이 무리라 생각해 참여하지 않았다. 과정이 끝이 나고 아이를 돌보며 한숨을 돌릴 때 협회 단톡방에 공저 이야기가 올라올 때면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던 때에 대표님은 협회를 통해 공부하신 모든 선생님들께 블로그를 시작해 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특별한 목적 없이 바로 블로그를 시작했다. 예전에 개설했던 블로그를 다시 재정비해 글을 올렸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셋째를 낳고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 셋째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었을 즈음이었다. 당시 나는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나에 대한 의식이 생기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잘하는 것 하나쯤은 있었으면 했다.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그렇다고 드러날 정도의 실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를 위해 글을 썼다.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으로 글쓰기를 내 안에 심고 있는 중이었다. 지인으로부터 "넌 뭘 하고 있어? 요새는 어떻게 지내?"란 질문을 받게 되면 당당히 "나 글 쓰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친정 가족들과 남편, 그리고 아이들만이 알고 있었다. 셋째가 자고 있는 사이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때면 간혹 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뭐 하고 있어?라는 질문에 글 쓰고 있다고 하지 못하고 그냥 쉬고 있다고 대답했다.
글쓰기는 나에게 생명의 동아줄과 같았다. 지금을 버티게 해 주었다. 셋째 출산 후 우울증이 올 겨를도 없이 정신없이 지내던 날들 속에서도 불쑥 솟아오르는 변화를 향한 갈망을 감당하기 위해 글쓰기라는 동아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삶을 변화시켜 줄 도구는 글쓰기뿐이었다. 셋째를 돌보며 첫째 둘째를 챙겨야 했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기도 했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더 심했다. 남편과의 자유롭지 못한 소통이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나'를 나라고 말하고 싶은데 계속해서 누구의 엄마이자 아내라고만 하는 남편이 미웠다. 남편이 바라는 대로 엄마와 아내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글쓰기'라는 하나의 산을 넘어야 했다.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셋째 아이가 잠이 들 때면 무조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스스로에게 내준 숙제이자 약속이었다. 잘 쓰고 못쓰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퇴고도 하지 않았다. 무조건 써야만 했다.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뿌듯했다. A4 용지를 연상케 하는 하얀 화면이 글자로 빼곡히 덮이면 글 하나를 완성한 것으로 생각했다. 순수하게 나 스스로 해내었다.
그럴듯한 하나의 제목을 달아 글을 완성하면 마치 승리한 마라토너가 된 느낌이었다. 승리하고 싶었다.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의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뚜렷한 직업을 갖고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딱 하나, 글쓰기만 잘하는 사람이면 되었다. 작가는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자와 같이 느껴졌다. 가장 동경하는 사람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로맨스, 스릴러, 범죄오락, 가족드라마... 장르에 상관없이 현실과는 다른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가장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이라 여겼다.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현실 속 나는 구석진 곳에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었기에 현실과는 다른 꿈을 꾸었다. 나의 진짜 모습을 직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꿈만 꾸었다. 글쓰기는 마음껏 내 마음대로 모든 감정을 표출할 수 있고 내 생각을 자유로히 펼칠 수 있는 도구였다.
누군가 내 글을 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가 의미가 있을 뿐 독자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생각하지 않았다. 블로그에서의 나는 푸르고 청정한 바다를 자유로이 헤엄치는 한 사람이었다. 누구의 엄마이자 아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냥 쓰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야기든 말이다. 조회수가 중요하지 않았다. 글에 대한 어떤 평가나 조언도 바라지 않았다. 평가를 받게 된다면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러다 어떤 분의 한마디가 내 마음을 움직였다. "댓글을 달고 싶은데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댓글을 달 수 없었어요. 그래서 좋아요만 눌렀어요." 순간 머리가 띵 했다. 그랬다. 누군가 읽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가족들로부터 상처받은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밉고 또 밉다고 원망의 마음을 쏟아내는 글이었으니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다 다른 사람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논리적이지 못한 글을 읽으며 이해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위로하기 위해 무조건 내 편에 서서 상대방 욕을 해줄 수는 없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은 것이 다행이이라는 생각 마저 든다. 그렇게 글쓰기를 통하여 나를 표현하게 되었다.
그런데 만약 상대방이 읽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하는 것에 집중했다면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글쓰기의 정답에 맞는 글을 쓰려고 했다면, 답이 있는 문제를 푼다고 생각했다면, 그 답에 맞는 글을 쓰려고만 했을 것이다. 한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했을 것 같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을 듯하다. 지금까지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리적인 글의 구조나 문장의 구성요소라는 정답이 있지만 그것에 끼워 맞추기 위해 애쓰지 않기 때문에 마음 편히 글을 쓰게 된다. 글을 쓰는 첫 번째 요소는 내 생각과 감정이다. 쓰려는 이야기가 얼마나 나를 가슴 뛰게 하는지가 가장 중요하다. 일단 쓰고 보는 것. 그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방법이다. 문장을 다듬고 정렬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내 글을 읽어줄 독자가 내 눈에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글을 퇴고하게 된다. 어떤 글이 좋은 글이고 잘 읽히는 글인지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알아간다.
나는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하다. 글이 잘 써질 때는 마치 모닝페이지를 쓰듯이 문장을 쓰면서 그다음 문장이 생각난다. 신기한 경험이다.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던 생각들이 꿈이라는 한 장면을 만들어내듯이 하나의 장면이 쫘악 글로 펼쳐진다. 의식하지 않아도 글이 써진다. 몇 시간 고민하고 쓴 글보다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힌다. 그런 글은 읽고 또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내 마음에 와닿는다. 글쓰기는 나의 마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 글의 첫 번째 독자는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