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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기술

돈 쓰는 일부터 토요일 밤에 친구를 불러 놀러 가는 일까지 우리는 매일 온갖 일을 행한다. 특히 행해져야 마땅한 일들이 있다. 설거지, 청소, 가계부 정리 등은 분명 행위의 영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또 다른 면, 즉 '존재함'에도 똑같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인간관계와 사랑이, 일상에 깃든 신성을 감지하는 것이, 한 줄기 햇살이나 새의 지저귐, 인간이 베푸는 친절에서 기적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존재함의 영역'이다.

-로버트 존슨, 제리 룰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중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 중 하나는 단순한 즐거움에 빠지는 것이다. 티브이나 좋아하는 영상물을 보며 밥을 먹거나 과자나 아이스크림 등 간식을 먹는 것이다. 계속해서 채널을 돌리며 흥미 있는 영상을 발견하기 위해 애쓴다. 음식은 맛있는데 티브이에 관심 없는 방송들만 나오면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아까워진다. 하하 웃을 수 있거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예능을 보아야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이 값어치 있어진다. 아, 잘 먹고 잘 놀았다 한다. 그러나 그 뒤에 몰려오는 공허함은 책임 못 진다.


엄지 손가락 안쪽 살과 손톱 사이에 아주 살짝 틈이 벌어져 아프다. 아이의 머리끈을 풀어주다 손톱 사이가 벌어진 건지 언제 벌어진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맨 손으로 설거지를 할 때마다 너무 아프다. 아이의 젖병이나 아이의 빨 때를 닦을 때 쓰는 아주 얇은 솔이 자꾸만 틈 사이의 살을 건드린다. 잘라내야 하는 손톱 바로 밑으로 살짝 벌어진 것인데 속 살이 아리다. 이삼일 전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설거지를 하거나 손을 써야 하는 일들이 많은 청소로 인해 나을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고무장갑을 옆에 두고도 맨손으로 설거지를 하니 나을 턱이 있나. 사서 고생하는 기분이다. 마치 전략이라곤 모르는 바보 같다.


벌어진 틈 사이로 살짝 보이는 속살이 빨갛다. 나는 생각해 본다. 나의 내면의 색깔은 무엇일까. 나의 내면은 아프지 않고 건강한 걸까. 밤늦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의 꿈에 진심인 걸까 생각해 보았다. 졸려서 눈은 반쯤 감겨있고 아이 젖병은 세재로 닦다 말고 번뜩 떠오른 생각을 적어보겠다고 키보드를 두드린다. 현재 시각 새벽 1시 33분, 곧 잠자리에 들겠다 다짐해보지만 생각이 멈추질 않아서 졸린 눈을 하고도 글쓰기를 놓지 못한다. 그냥 자도 될 텐데 나는 도대체 어떤 결과를 바라고 있길래 이러고 있는 걸까.


잠시 생각을 멈추어 본 적이 있는가? 불멍, 물 멍 등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는 사람들이 많다. 바빠서 지치거나 혹은 생각이 많아 머리가 아플 때 멈을 때린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에서 벗어나 온전히 나를 바라보고 찾고자 할 때 잠시 멈추어 자신을 바라보기. 나와의 약속이다. 반복되는 육아와 살림으로부터 벗어나 마냥 놀고만 싶었다. 맛있는 걸 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싶었다. 우리는 늘 이렇게 해야먄 하는 일들의 반복 속에서 전쟁을 치른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반드시 행해야 만 하는 반복의 세계 속에서도 우리는 멍 때릴 순간을 찾으려고 애쓴다. 캠핑을 간다던지 여행을 간다던지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순간을 만든다.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멍을 때리기 위해선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캠핑을 가려면 텐트부터 시작해서 온갖 종류의 캠핑 장비를 구입한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늘어나는 거리마다 늘어나는 주유비 혹은 교통비부터 숙소비에 밥 먹고 관람할 비용까지 멍 때리려다 생각이 더 많아진다.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하랴 가야 할 곳 찾아보랴 진정한 내면으로의 여행이 가능한 걸까. 우리에게 진정한 쉼과 멍이 있긴 한 걸까. 공부를 하고 과제를 하면서도 끊임없는 생각과 성찰이 요구된다. 멈춤이 없다. 멈춤이라는 것이 존재하긴 한 걸까.


가지 않은 길을 향한 허기는 상징적 경험을 통해 채울 수 있다. 많은 경우 '살지 못한 삶'이 현재의 삶보다 딱히 멋지거나 굉장하지도 않고 그저 다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존재함에 꼭 필요한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중


일상 혹은 관계에 지쳐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혼자만의 삶이 아니기에 나무에 곁가지를 쳐내듯이 불필요한 감정과 일들을 걷어내야 한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되고 늘 선택 앞에서 수많은 고민들이 나를 가로막는다. 나의 무의식 속의 감정들과 욕구를 들여다보며 성장을 꿈꾸지만 함께 사는 가족들은 나와 정반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나'라는 존재가 중요하지만 상대방의 의견에 '나'는 사라지기도 한다. 결국 꾹꾹 참아내고 눌러내다 어느 순간 폭발해버린다. 살아보지 못한 삶에 대한 꿈이 바사삭 부서져 버린다. 온전히 독립적인 '나'가 되고 싶어도 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럼에도 순간순간 떠오르는 삶의 고민들은 우울과 슬픔으로 내게 다가온다.


꾹꾹 눌러 담은 욕구는 어느새 터지기 직전까지 갔다 결국 터져버리고 말기에 욕구에 대한 감정의 에너지를 어떤 식으로든 표출해내야만 한다. 오로지 나의 의지로 환경을 바꿔낼 수 없다면 나를 비워낼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내겐 글쓰기이다. 무엇이든 담아낼 수 있다. 내 안의 상상을 다 꺼내 공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마음을 담아 써내려 갈 순 있다. 더 좋은 표현을 찾아내려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매일매일이 좋을 수도 없는 현실에 꿈 조차도 버거워질 때도 나의 이런 에너지를 표출해 낼 수 있는 건 오로지 글쓰기뿐이다.


사람들은 '열등감'을 호소한다. 나는 그럴 때 말한다. "열등감을 호소하는 것을 보면 정말 열등한 것이 있기는 한가보다"라고. 누구나 우월 기능과 함께 열등 기능을 가지고 있고, 열등하지 않은 사람이란 세상에 없는데 자기만 자기고 있고, 열등하지 않은 사람이란 세상에 없는데 자기만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못난 생각이다. 자기가 못났다고 생각된다면 자기 마음속에 틀림없이 자기를 못났다고 보는 또 하나의 '나'가 있을 것이다. 그 또 하나의 '나'는 대단히 잘났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사사건건 못났다고 자기를 나무라는가!

'열등감'은 호소하는 것으로, 또는 위로하는 것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열등한 부분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서 그것을 발달시켜야만 해소된다.

-이부영, 분석심리학 이야기 중에서


내 안에는 여러 가지 '나'가 있다. 우월한 나, 열등한 나 등, 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여러 목소리들이 있다.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넌 이래서 안 된다며 나를 가로막기도 한다.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기능에만 묻혀 진짜 나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열등 기능을 발달시켜야 한다. 열등 기능을 발전시키는 것에 꾸준한 인내와 도전, 노력이 필요하다. 어렵게 느껴져 피할 필요는 없다. 열등감은 호소하는 것이라 했듯이 글을 통해서, 혹은 자신만의 어떤 도구로 표현해 내면 된다. 표현해 내는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을 직면할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라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호소의 내용을 기록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속에서 불평이든 어떤 메시지든 떠오른다면 내면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불현듯 떠오르는 어떤 느낌이나 감정에 집중해 그것이 왜 나타났는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면 된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이 나의 의도든 아니든 때론 감정의 변화로 자신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삶이 이끌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누구 때문이라고 남 탓을 하게 된다. 원하는 방향이라 생각해 행했어도 어느새 후회의 감정이 물밀듯이 몰려오기도 한다. 되돌릴 수 없다는 생각에 좌절을 하고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평생 동안 자신의 세계를 자신이 만들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 자신이 세계라고 믿는 것들이 세계 자체가 아니라 나의 의식에 현상되어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걸 깨닫지 못한다. (...)

진짜 현실이라고 믿어온 세계는 알고 보면 자아가 만든 세계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도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내가 만든 것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나란 진짜 나가 아니다. 만들어낸 나일뿐이다.

-인스타그램, 2 indios


융 심리학에서 투사에 대해 배우던 중 알게 된 글의 일부이다. 내가 전부라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결국은 내가 만들어 낸 세계라는 것이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나쁜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데 그걸 모르고 밖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자신 안의 불안이나 충동들이 다 내 안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평안을 찾으려 한다. 그 불안이 잠시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고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내면에 있는 진짜 '나'를 찾아가는 과정은 때론 괴롭다. 괴롭지만 남 탓을 하기 이전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에게 투영된 자기의 모습이 결국은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에는 자신의 콤플렉스뿐 아니라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좋은 성격까지 여러 가지 다양한 내용들이 있다.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모습들을 찾아 나가면서 내 존재의 진정성을 깨달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의 시선과 다른 사람을 향한 나의 시선 속에 자신을 가두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개발되지 않고 남아있는 나의 잠재력을 위해서 내면과의 대화를 시작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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