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사랑하고 있다'
배우 송중기가 출연한 침구 광고의 메시지이다. 길지 않은 메시지임에도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침구가 주는 따뜻함으로 사랑을 느낀다는 이야기일까.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왠지 모르는 불편함은 불안을 야기한다. 사랑받지 못함에 의기소침하고 거절당하는 느낌에 좌절을 하곤 한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란 프로그램이 돌아왔다. 6세이지만 말도 3세 아이 정도의 수준이고 늘 불안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 아이가 나왔다. MC인 이현이는 사연 주인공의 VCR을 보는 내내 충격과 안쓰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나 또한 아이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아이가 깜깜한 것이 무서워 문을 열어놓자 "아빠가 와서 문 한번 더 열면 맞을 거야. 맞고 울고 맞고 울고, 편히 맞고 잘래?" 하는 협박조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아빠가 방을 나가고 이불속에서 숨죽여 우는 아이를 보니 눈물이 흘렀다. 나는 사연의 주인공인 아이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동시에 부모로서의 나는 어떤 모습인지, 제대로 아이를 사랑하고 있는 건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솔루션을 주기 위해 참여한 임상심리사 조선미씨는 아빠에게 "아이 때리면 아동학대로 신고할 수 있는 거 아시죠?"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아빠는 알고 있다 대답하고는,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아빠는 분명 아이를 사랑하고 있었다. 단지 사랑하는 방식을 몰랐을 뿐. 이제부터가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잘못됐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루션 후 아빠는 아들 넷과 함께 잠에 들며 주인공인 아이도 편히 잠을 자게 되었다.
부모로서의 '나' 이전에 나는 어떤 사랑을 받고 자랐을까. 최근 읽고 있는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이란 책에서는 아이의 감정을 읽어주기 전에 지도하는 사람 자신의 '초감정'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아이가 큰소리로 떠들 때, "어디서 큰소리냐" 하며 호통을 치면서 아이가 눈물을 쏙 뺄 때까지 혼을 내는 경우가 있다. 이때 아빠가 왜 아이가 큰소리만 내면 이성을 잃는 것인지 이해하려면 감정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야 한다. 아빠는 어릴 적 군인이었던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면 숨 한 번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들어오신 날이면 아이들을 집합시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훈계를 했다. 아버지의 큰소리를 들을 때면 귀가 먹먹해져 왔고 아버지가 너무너무 싫어 가출이라도 하고 싶었던 심정이었다. 큰소리가 유난히 싫고 거슬리는 감정 속으로 들어가 근원을 살펴보니 어릴 적 큰소리를 쳐서 집안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던 아버지에 대한 공포, 미움, 분노, 무기력함, 불안 등의 감정이 있었다. 이처럼 감정이 그 감정 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있는 또 다른 감정을 '초감정'이라고 한다. 초감정은 감정 뒤에 있는 감정, 감정을 넘어선 감정, 감정에 대한 생각, 태도, 관점, 가치관 등이다.
이처럼 아이의 감정을 읽기 이전에 내 안에 있는 초감정을 이해해야 한다. 초감정이 있을 거라 유추되는 상황이 없더라도 슬픔, 분노, 미움, 질투 등 각각의 감정을 점검해 보면 자신의 초감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크게 두 가지 핵심 감정인 분노와 슬픔 중 하나만이라도, 각 질문에 답을 해보면 자신의 초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1. 분노에 대하여
어릴 때 분노에 대한 경험이 있었는가?
가족들은 분노를 어떻게 표현했는가?
당신이 화났을 때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당신의 어머니는 화날 때 어떠셨는가?
당신의 아버지는 화날 때 어떠셨는가?
무엇이 당신을 화나게 하는가?
화날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2. 슬픔에 대하여
어릴 때 슬픔에 대한 경험이 있는가?
가족들은 슬픔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당신이 슬플 때 부모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는가?
당신의 어머니는 슬플 때 어떠셨는가?
당신의 아버지는 슬플 때 어떠셨는가?
무엇이 당신을 슬프게 하는가?
슬플 때 당신은 무엇을 하는가?
은연중 나도 모르게 슬픔의 감정이 불쑥불쑥 틔어 나올 때가 있다. 왜 그런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위의 질문처럼 분노와 슬픔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면, 어릴 적 분노와 슬픔을 느낀 적이 있었는지 의아해진다. 친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빠의 눈물을 볼 수 없었고, 엄마가 시어머니인 죽어가는 할머니를 대소변 받아내시며 2년 가까이 병시중을 들었을 때도 엄마의 힘듦이나 지침, 외로움 등을 표현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단지 엄마가 방에서 등을 돌리고 혼자 흐느껴 울었던 기억 밖에는 없다. 가족들에게 직접적으로 표현한 기억이 없다. 언니와도 투닥투닥 싸울 때는 많았지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느라 애쓰고 있었던 건지, 모두가 힘들었던 나의 사춘기 시절에 일어났던 할머니의 죽음은 이상하게도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그저 내 머릿속에 물음표만 달릴 뿐 그 이유를 모르겠다.
오늘 아침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역시나 엄마는 나에게 연휴에 무얼 했는지 시댁에 다녀왔는지 물으셨다. 별일 없냐고 물어보시며 아빠에게 자주 혼나는 둘째가 잘 있었는지 물으셨다. 나는 엄마의 물음에 "아무 일은 없는데 둘째가 만족스럽지는 않겠지..." 하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한 번씩 때를 쓰는 아이에게 감정 코칭 책을 읽은 대로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는 시도를 해보았지만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길어지고 엄마가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 같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편도 아이에게 매는 들지 않았지만 상처되는 말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침에 유치원을 등원시키려 준비하는데 날이 쌀쌀해지니 잠바를 입으라고 했다. 아이는 입지 않겠다고 했고 가져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나는 아이가 감기에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어 날이 춥고 이제 겨울이 되어가니까 잠바를 입어야 한다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아이는 결국 나의 원성에 잠바를 입었고 버스를 탈 때 엄마가 가져가 라고 했다. 밖으로 나가면서 아이는 "유치원에서 잠바 벗으면 어디에 두어야 해?"라고 물었다. 그때 아! 내가 아이의 감정을 몰라주었구나, 왜 잠바를 입고 싶어 하지 않는지 물어보지도 궁금해하지 않았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아이의 질문에 "그럼 벗어서 가방에 넣어두면 되지. 잘 안되면 선생님한테 도와달라고 말하면 되지" 하니 아이는 "아~!" 하며 궁금증이 해결된 것 같았다. 아이는 잠바를 입고 가서 원에서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몰라서 잠바를 입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잠바를 입으라고 강요해버린 것이 되어버렸다. 어떤 상황에서 잠바가 불편한지 물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아이가 추울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날씨가 추운 것 이전에 아이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봤어야 했다. 나는 다시 반성했다.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에서는 '자기감정에 솔직한 부모가 아이 감정도 잘 안다'라고 했다. 은연중 불쑥불쑥 튀어 오르던 나의 슬픔이란 감정은, 감정을 늘 뒤에 숨기기에만 바빴던 부모님으로 인해 나타난 것 같다. 가족이지만 함께이지 않은 느낌과 이해와 지지가 부족했던 경험으로 인해서 늘 혼자인 것 만 같은 느낌이 항상 나를 지배했던 것 같다. '정서적 금수저'란 말이 있다. '내 아이를 위한 감정코칭'의 저자인 최성애, 조벽 박사의 또 다른 책인 '정서적 흙수저와 정서적 금수저'에서 나온 말이다. 책에서 저자는 '저희는 사람의 미래를 좌우하는 '수저'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금수저로 태어났지만 자신이 불만스럽고 세상이 불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일은 없고, 잘못은 남 탓이라 여기고 만사가 짜증스럽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정서적으로 빈곤합니다.'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지 못해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불만을 많이 갖고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스스로 헤쳐 나아갈 때 부딪치는 여러 어려움들이 분명 있을 것인데, 남 탓을 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며 다독일 수 있기 위해선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 생각이 된다.
저자는 또한 '애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으면 분리 과정이 순탄하지 않고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이 되어 결혼한 자녀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엄마 곁은 떠나지 못하는 마마보이가 되거나 독친의 트라우마로 어른이 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혼해도 갈등을 겪거나 이혼할 확률이 더 높은 경향이 있습니다. 안정적 애착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별과 사별의 고통을 원만하게 다스리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과 불안증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 또한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결혼으로 도망쳤지만 완전히 도망치치 못했다. 온전히 독립적인 한 가정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어린아이가 부모 곁에서 보살핌을 받아야 하듯이 내 안에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는 계속해서 부모의 보살핌을 요구했다. 이런 나의 요구에 나의 친정부모님은 한걸음에 달려와 나를 감싸주었다. 뒤늦은 부모의 보살핌은 독립을 방해했다. 솔직하지 못했던 부모와, 독립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어린아이가 만나 힘든 시기를 경험해야 했다. 나의 남편과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멀어져야만 했다. 그래야 나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었다. 엄마는 언니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육아로 행복보단 힘들었던 기억 밖엔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언니를 낳았을 땐 고작 23살이었고 나를 낳았을 땐 25살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의 나이이다. 엄마 또한 독립해 본 적 없이 아빠와 가정을 꾸렸던 것이었고, 늘 장사로 바빴던 엄마로 인해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셨다. 제대로 된 애착관계가 형성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해결되지 못한 엄마의 어린아이의 사랑이 나에게로도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제라도 나를 알아차릴 수 있어 다행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천주교의 기도문에 나오는 '내 탓이오'라는 말이 와닿는다. 전 글에서도 언급했던 표현인데 이 말만큼 와닿는 표현도 없는 것 같다. 나 자신이 온전히 '나'가 되었을 때 진정으로 사랑받을 수 있고 그래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받고 있다. 그래서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