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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히 나와 너를 바라보고 사랑하게 되기를

시간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다면 그건 바로 치유와 회복 그리고 알아차림일 것이다. 우리에겐 자기실현의 욕구가 있으니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를 알아갈 기회는 언제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고, 그것을 활용하는 건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누구에게든 그 '때'가 있고, 그 '때'는 각자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때가 왔음을 알아차리게 되면 자신의 살지 못한 삶을 되돌아보고 흘려보내면서 성숙한 한 사람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가족들은 내게 말했다. 왜 꼭 공부를 지금 해야 하냐고. 아이들이 더 큰 다음에 하면 되지 왜 지금 해서 싸움을 만드냐고 말했다. 내 기준으로만 생각하면 지금이 나의 '때'이자 기회가 온 시기임을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처음 시작은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한 목적으로서의 공부였지만 셋째를 출산하고 아이가 성장하는 걸 바라보면서 나도 같이 성장해야겠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 속에 있는 '자기'의 욕구가 올라온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정말 다양한 삶이 있다. 자신의 생활이 어려워도 자신의 것을 나누며 베풀고 위하는 삶도 있고 개인적 욕구에만 집중해 결혼하지 않고 즐기며 사는 사람도 있다. 혹은 남을 해하는 사람도 있다.


삶이란 건 선택할 수 있는 것일까? 자신의 살지 못한 삶이 그림자가 된다고 하는데, 그 살지 못한 삶으로 인하여 사람은 온전히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아무리 많이 가져도 더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 중 하나라면 그 어느 누구도 온전히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마음이 왜 일어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내가 만든 나만의 세계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다.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왜 죽을 때까지 자신의 세계에서 나오지 못하거나, 혹은 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려야만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때까지 나는 나 자신이 완성된 사람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내가 바라는 이상을 위해 애쓰고 노력할 수는 있어도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신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만은 달라져 있을 거라 믿는다.


타인을 향해 있던 시선들이 나에게로 향한 지금이 나의 성숙을 바란 그 마음이 이루어지는 때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지식만을 습득하고 그 지식으로 직업을 갖는 것에만 몰두했다면 지금의 이 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많이 갖고 싶은 욕심이 내 안에 가득 차 있었다면 자기실현을 바라던 내면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왜 직업을 갖고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단순히 돈을 벌어 잘 먹고 잘살고 싶었다. 여행을 가고 싶었고 아이들의 교육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 아니, 보탬을 넘어 온전히 책임지고 싶었다. 그동안 의지하며 살아온 삶을 지우고 살아보지 못했던 독립된 삶을 살아보는 기회이자 어릴 적 부모로부터 받았던 상처에 대한 보상이 될 거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어른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경제적으로 나 자신과 가족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어른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온전히 독립된 '나'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의 부모에게 천덕꾸러기가 아닌 믿음직스럽고 자랑스러운, 자랑하고픈 자녀의 모습이 될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내 안에 있던 어린아이가 인정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내 안에 있던 마음들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이 인정해주려고 한다. 나를 알아차리게 된 이때를 놓치지 않고 성숙의 기회로 삼아 더 나은 '나'가 되고 싶다. 나의 부정적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지 않고 잘 다스려 성숙한 '나'가 될 것이다. 그래야만 나의 자녀들에게도 온전한 '나'로서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성숙한 인간은 부정적인 생각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다. 보통 부모들이 자녀의 "떼"를 대할 때 바라봐 주는 것이 아니라 혼을 내기 일쑤다. 우리도 그랬다. 모든 가족들이 그랬다. 떼를 쓰면 안 된다고 다그치고 가르쳤다. 그 결과 아이는 자신의 감정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마다 더 많이 울부짖었다. 왜 안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자신이 무얼 원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심리학 공부를 통해 아이의 감정을 알아주기 시작했다. 나의 감정이 소중하듯 다른 사람의 감정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랑에는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됐다.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몰려와도 잠시 멈추어 나 자신과 아이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나의 깨달음을 가족들과 공유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자신을 기다려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걸 알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남편은 나의 이런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나에게 "그래서 말로 해서 해결됐어?" 하며 몰아붙였다. 나는 남편의 말에 어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모니까 기다려야지. 아이가 우리를 기다려?" 하며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도 다녀 본 사람이 다닌다는 말이 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다 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 말에 십분 공감했다. 나의 생각으로는 칭찬을 받아보거나 제대로 된 관심을 받아보지 못해서 세 아이를 낳은 엄마가 되었어도 아직도 관계가 어렵다. 자꾸만 받아보지 못한 관심을 상대에게 받으려고 해서 자꾸만 트러블을 일으켰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큰 상처를 받은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계속해서 무얼 주어야 할 것 같았고 또 의지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내향적인 성향만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나를 다 설명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주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 어른들과 많이 어울리게 됐는데 생각해보니 나의 친언니와 솔직하게 마음을 나누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언니들을 통해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나의 속 이야기를 하게 됐고, 상대에겐 그것이 부담이 됐었던 것 같다. 그저 가벼운 관계를 만들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수의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정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 하고만 관계를 맺으려 했던 것이다.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마음을 접고 상대를 피했다. 오로지 '나'가 '나'의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맛있는 걸 먹고 혼자 재밌는 걸 보고 혼자 돌아다녔다. 나쁘지는 않았다. 눈치 볼 상대가 없으니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움직이면 됐다.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온전히 나 자신과 타인을 바라볼 기회가 생겼으니 관계를 회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온전히 나와 상대를 인정할 수는 없어도 상대에 대한 기대는 갖지 않게 되었다. 더 큰 이상이나 환상을 꿈꾸지 않게 됐다. 오로지 '나' 자신을 '나'로 인정하고 받아들여 상대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나는 바라본다. 나와 상대를 온전히 바라보고 사랑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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