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분노가 드러나는 부분이 어렸을 때의 상처가 겹쳐지는 것이라는데, 남편이 공감보다 타박이나 탓을 할 때 이게 뭐지? 남편이 원하는 대로 남편이 스트레스받지 않도록 그런 상황을 만들어줘야 하는데 내가 그렇게 해주지 못하는데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말에 상처받는 건 당연한 건데 무조건 내 탓을 하는 남편을 바라볼 때마다 힘이 든다.
남편이 화를 낼 때마다 남편의 어린 시절의 상처가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지만 남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 남편을 보면 이해가 된다기보다 말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건가?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셋째 아이가 노리개 젖꼭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다가 중간중간 깨어 우는 바람에 나도 잠을 푹 잘 수 없고 남편도 깨버리는 데, 남편은 나에게 같이 깨느라 잠도 잘 못 자고 힘들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러는 거야?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야? 어린이집이랑 안 맞는 거 아니야? 어린이집에서 잠은 잘 자?라고 묻는다. 혹은 애를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
이에 대답을 하면 할수록 미궁으로 빠져버린다. "나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야. 어떻게 당신 원하는 대로 스트레스 안 받게 다 맞춰?"라고 말하면 남편의 화만 돋울 뿐이다. 며칠 전 남편이 돌돌이를 골프채 삼아 휘두르다 살점이 떨어져 살을 꿰매야 했다. 그때 남편은 헛짓하다 이렇게 됐다고 만약 내가 이렇게 됐다면 화를 냈을 거라 했다. 나는 "많이 놀랬겠다. 많이 아프지?"라고 말했다.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것이고, 사고로 인해 자신을 탓하기보다 얼른 치료하는 것이 먼저라 생각하는데, 남편은 자신이 헛짓거리를 하다 다쳤다며 자신을 탓했다. 나는 남편의 어린 시절 작은 실수도 부모님께 용납이 되지 않아 부모님이 남편에게 화를 내셨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라면서 대체로 다치거나 외상으로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일이 없었던 나는, 앞으로도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물론 남편이 도와주겠지만 화를 먼저 낼 것이 분명하기에 아픈 것도 서러운데 화받이까지 되어 눈물을 배로 흘릴 것이 뻔해 비참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남편의 화 때문이라 생각하니 초라해지는 느낌이다. 가족이든 누구든 사람이라면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다친 것도 아픈 것도 내 탓을 해야만 한다면 마음은 더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우울함이 나를 침범해 버릴 것만 같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이가 너무 예뻐도 어쩔 수 없이 화가 날 때가 있다. 셋째 아이의 경우 의사표현을 울음으로 표현할 때가 많다. 두 돌이 지나면서 원하는 것이 확실해져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길을 가다가도 땅바닥에 주저앉거나 망부석이 되어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떼를 쓴다. 특히 노리개 젖꼭지를 뗀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이 오면 바로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어댄다. 공공장소에서는 아이의 울음으로 난감해지기 일쑤다. 집에서는 아이가 울더라도 최대한 화를 내지 않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보지만 계속해서 울음이 이어지고 아이의 울음과 함께 다리를 내려치는 등 몸짓이 과격해지면 엄마인 나도 달랠 방법이 없으니 아이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아이를 안아주려 해 봐도 아이의 움직임이 멈추지 않으면 손을 놓아버리고 인상을 찡그리게 된다.
나의 엄마도 내가 울음을 그칠 줄 몰랐을 때 달래기는커녕 화를 내거나 손을 놔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적 한 번 울면 멈추질 않았고 목소리도 커 이웃집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했다. 한두 살 정도로 어렸을 때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나의 엄마도 지금의 나처럼 아이의 울음을 견디지 못했을 것 같다. 평소 나와 함께 있을 때 거의 무표정이거나 대화가 없는데 점점 커가면서 엄마와 마찰이 생길 때마다 엄마는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내 방문을 걷어찼다. 조용하고 얌전해 보이시던 분이 화만 나면 나에게만 그렇게 분노를 표출하셨다. 나 또한 첫째와 둘째를 키우면서 아이들이 떼를 쓰기 시작했을 때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다는 그 상황이 견디기 어려워 같이 소리를 질렀다.
셋째 임신 중기부터 심리학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절대 아이에게 화를 내지 말자 다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가 떼를 쓰고 울어재낄 때는 힘이 든다. 몸이 힘든 것보다 아이를 달래지 못한다는 점에 좌절감이 든다.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하자 다짐하지만 아이의 울음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아이에게 절대 화를 내지 말자 했던 다짐은 아이가 떼를 쓰거나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 아이를 달랠 수 없다는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엄마의 화와 분노는 남편으로 이어져 왔고 그럴 때마다 남편에게 맞춰주지 못하는 상황과 아무리 이해해보려 해도 내 마음이 먼저 다치는 것에 좌절을 하고 만다.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는 원인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화와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사소한 것도 사소한 것으로 흘려보내지 못한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화는 엄마의 화와 아이의 울음과 떼로 이어진다. 소리를 지르는 듯한 느낌이 닮았다. 남편이나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부인하지만 나에게 상처가 되어 나를 탓하는 듯한 소리는 트라우마가 되어 내 안에 남았다. 때로는 남편의 화가 공포가 되고 두려움이 된다. 본인은 남 탓, 상황 탓을 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의 화로 상처가 될 거라 생각지 못하고 자신의 화난 감정이 우선시 된다. 또한 남편은 계속해서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어린아이가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아이도 바라보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부모를 탓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부모를 탓하고 미워하게 되면 죄책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상처와 마주하지 못한다.
남편과 반대로 나는 나의 원가족과 점점 멀어지고 싶어 한다. 부모님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도움이 필요할 때 요청하지 않는다. 엄마는 분명히 언니집에 가서 언니집과 조카를 돌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까이 사는 우리 집에 엄마를 불러 힘들 때 도와달라 할 수가 없다. 거기에서부터 엄마에 대한 사랑에 좌절감을 느낀다. 그리고 내가 전화하지 않는 이상 엄마와 아빠 언니에게 전화가 오지 않는다. 만약 엄마에게 전화가 온다면 아빠나 언니가 나에게 먼저 전화를 한 것이고 어떤 소식이 전해지면 득달같이 전화가 온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말리려고 하거나 자랑거리가 되거나 그들끼리 수군댈 이야깃거리가 있을 때 전화가 온다. 내가 전화를 하지 않는 이유는 나의 이야기를 아빠 엄마 언니 그들끼리 전달하고 나누기 때문이다. 비밀이 없다.
아빠 엄마 언니는 성향이 판박이다. 현실적이고 이익이 되는 것에만 매달린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이라면 무조건 회피하고 욕을 한다. 그들만의 세상에 절대 침범하고 싶지 않다. 나는 나로서 나에게 정직하고, 세상에 베풀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이든 누구의 탓을 하지 않고 나에게서 원인을 찾고 건강하게 극복하고 회복하여 성장할 것이다. 그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면서 스스로를 돌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자녀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다. 독립된 인격체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의 모습 그대로를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가족 관계는 혈연으로 이어져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독립된 인격체가 모인 집단이다. 서로 다른 자아를 가진 존재이자 사람이기에 서로가 침범할 수 없다. 은연중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덧입히기도 하는데 그 생각이 아이도 모르게 자신의 생각이 되어 자신을 가로막는다. 부모가 겪었던 어려움을 자녀도 똑같은 상황에서 겪게 될 것이고 똑같은 상황에서 분노를 일으키고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물림이다.
가난만이 대물림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나 정서 또한 대물림되어 정서적 가난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왔다. 자녀가 소유물도 욕망덩어리도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로 살기 위해 공부를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찾아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은 내가 나의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공부를 통해 지식을 갖고 직업을 갖는 것은 두 번째다. 나로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다.
르세라핌은 unforgiven이라는 곡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내가 제일 싫은 건 낡은 대물림...' 여자라서 밥을 하고 살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지금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다. 사람은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사랑을 주고도 싶어 한다. 하지만 사랑을 받기 위해 착한 모습만 보이려 한다면 스스로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고 싶어 하는데 결국 그런 바람은 사랑받기 위함이다. 나란 존재로 인해 부모가 행복하길 바람이고 그런 자신을 보며 웃어주고 기뻐해주길 원하는 것이다. 그게 다이다. 사랑.
사랑은 때로 욕망이라는 독이 된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족을 닦달하고 미워한다. 나의 신조는 '나 스스로 빛을 낼 수 있다'이다. 누군가로 인해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로 빛을 낼 수 있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런 어른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자신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빛을 낼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주어야 한다. 나의 아픔과 상처가 부모로부터 흘러나왔을지 언정 그들이 나를 미워해서였다는 생각만은 버려야 한다. 낡은 대물림은 버려야 하듯이 원망이나 미움은 흘려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내면아이를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자체로 살아야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