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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유나 Apr 20. 2023

가루도시에서2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다음 날, 기척에 눈을 뜨니 룬의 침대 옆에 마르헨이 서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따뜻한 차를 끓여드릴게요."

   간밤엔 검은 언덕에서 노을 구경을 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룬은 공포감을 떨쳐내고 마르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오늘은 다른 도시로 넘어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다시 온 거죠?"

   룬은 마르헨이 반가우면서도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는 그런 식으로 작별인사를 하지 않거든요. 어제는 죄송했어요."

   룬은 진심이 담긴 사과에 바로 감정이 누그러졌다. 어제는 그럴만한 일이 있었으니 마르헨의 상처도 클 것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아요. 그보다 그런 소문을 계속 들어야 하는 줄은 몰랐어요. 저랑 같이 있었으면 더 힘들었겠죠, 뭐."

   포트에 물이 끓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려왔다.

   "준비하고 나와서 테이블에서 차를 드실래요? 아니면 방으로 찻잔을 가져다 드릴까요?"

   "금방 준비하고 부엌으로 갈게요."

   마르헨이 방을 나가자 룬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도시를 떠나기 전에 마르헨을 만나지 않았다면 영원히 찜찜했을 것이다.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벼이 발걸음을 옮겼다. 룬이 찻잔이 놓인 자리에 앉자 마르헨은 흰 테이블 위로 포트를 가지고 왔다. 찻잔 안에는 검은 꽃이 들어 있었고, 마르헨이 뜨거운 물을 붓자 수증기가 퍼짐과 동시에 달콤한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향이 독특하네요. 이것도 가루도시에서만 나는 차인가요?"

   룬은 달콤하던 향이 금세 화사한 향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입술에 갖다 대니 진한 색과 달리 은은하게 감도는 맛이 좋았다. 여름에는 차갑게 얼음을 넣어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네, 맞아요. 슈피쵸라는 꽃이죠. 검은 언덕에서만 나는 꽃인데 이제는 구하기가 힘들어졌어요. 예전엔 그곳이 꽃밭이었는데, 놀랍죠? 놀러오는 사람들이 많이 뽑아 가기도 하고 관광 상품으로 쓰기 위해 대거 뽑혔어요."

   "그러고 보니 어제는 한 송이도 보지 못했어요. 물론 정신이 없었지만. 제가 귀한 차를 마시고 있네요."

   검정색으로 된 모든 것을 싫어할 것 같던 마르헨도 찻잔을 하나 더 꺼내와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이건 저도 정말 좋아하는 차예요."

   마르헨은 포트를 내려놓고 양 다리를 의자 위로 접어 올려 끌어안았다. 다시 한 번 공기 중에 달콤한 향이 퍼지다가 그윽하게 사라지고 화사한 향이 맴돌았다. 룬은 따뜻한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면서 온몸에 깊은 온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사과하러 와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사과 받고 싶다는 내 생각이 어리석었어요. 같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래요? 저는 여행자니까요. 함께 여행을 다니다가 살고 싶은 곳이 생기면 마르헨은 거기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 말고 좋은 곳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마르헨은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입술에 가져다 대고 잔을 기울였다. 낯선 친절을 받아들이기 꺼리는 모양이었다. 잔뜩 웅크린 고양이 같았다.

   "대답하기 어려우면 오늘 오후 전까지 말해줄래요? 저도 다시 짐을 챙겨야 하고 정리를..."

   "룬의 일정에 차질을 빚고 싶지 않아요. 저는 이곳에 머무를 거예요."

   자신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대답한 마르헨에 놀란 룬은 상대를 설득하려고 했다.

   "어딜 가든 이곳보다 무섭지는 않을 거예요. 다른 곳에 가면 당신 피부병을 치료할 수도 있잖아요."

   "제가... 불쌍한가요?"

   룬은 실수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구나 나를 상처 입힐 수 있지만 누구든지 나를 불쌍히 여기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이곳을 바꿀 거예요. 슈피쵸도 한가득 심을 거고 검은 물감을 칠하지 않아도 괜찮은 곳으로 만들 거예요."

   "마르헨, 미안해요. 기분이 나빴을 것 같아요. 당신을 돕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요. 미안해요."

   룬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더 이상 화사한 향은 남아있지 않았다. 애매한 온도가 차를 더 텁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매력적인 차였다. 마르헨 또한 조용히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마셨다. 대화가 끝나니 한결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지쳐 보이기도 했으나 어딘가 안정돼 보이는 것이, 마르헨의 몸속 어딘가에는 중심을 잡아주는 추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만들었다. 룬은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아쉬워졌다. 곧 짐을 챙길 생각에 몸도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룬은 아직 따뜻한 포트의 물을 다시 찻잔에 따랐다. 아까의 또렷한 향도 뜨거운 물도 아니었지만 이 시간이 조금 더 지속되었으면 했다.

   "룬, 고마워요. 당신은 제게 친절을 베푸는 군요."

   갑자기 마르헨이 입을 열어 당황했지만 자신을 용서하는 너그러움에 룬은 되려 고마워졌다.

   "하지만 저는 이곳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어요. 모두가 사정이 있고 각자 다 다르다는 걸 언젠가 이 도시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저에게도 친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주세요. 친구들과 이 도시를 바꿀 궁리를 하고 있으니까요."

   "응원할게요."

   진심이었다. 룬은 마르헨이 불행하지 않았으면 했다. 게다가 룬의 머릿속에 식당 종업원 얼굴이 스치자 마음이 놓였다.

   '좋은 친구.'

   룬은 떠돌이 생활을 하는 자신의 처지가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다르다는 말이 그를 안심시켰다. 룬은 여행자일 수밖에 없고 마르헨은 자신의 주변을 바꿔나가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룬은 짐을 싸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정리를 하러 가봐야겠어요."

   "저도 룬을 응원할게요."

   마르헨도 그를 따라 일어나 룬을 향해 다가갔다. 두 사람은 가벼운 포옹을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짐을 챙긴 룬은 식사를 하고 갈까 고민했지만 크게 내키지 않았다. 그가 짐을 싸는 사이 마르헨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싱크대 옆에는 아까의 찻잔 두 개가 정갈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룬은 가방을 짊어지고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장 옆에는 잘 포장된 선물이 놓여 있었다. 검정색이 아닌 포장지가 낯설었지만 그 위에 적힌 글자가 친숙했다.

   '룬'

   최대한 깔끔하게 쓰려고 노력한 이름 한 자가 적혀 있었다. 룬은 그 선물을 챙겨 들고 검은 거리로 향했다. 하얀 포장지는 검은 거리에서 더 희게 빛났다. 기차 안에서 룬은 포장을 뜯어 보았다. 검정 씨앗이 한 줌 담겨 있었다. 룬은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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