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집

호명하다

2

by 조연지

진저맨은 마트에 가다가 전 직장 동료를 만났다. 그는 진저맨을 진저맨이라 부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그랬다. 그는 진저맨의 이름을 불렀고 진저맨은 자신의 이름을 아주 오랜만에 들은 것 같았다. 진저맨은 자신의 이름을 두 번이나 들은 후에야 동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몸을 돌려세웠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이사를 해야 했어. 원룸을 구해 혼자 나왔지.

저쪽 근방에 있는 원룸촌에 있는 거야?

맞아. 가족을 잃었어. 내게 남은 건 이제 이 방 한 칸뿐이야.

결국 헤어지게 됐구나.

동료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카트를 끌며 멀어졌다. 카트 안에는 레토르트 식품 몇 가지가 담겨 있었다. 진저맨은 그를 불러 세우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의 진저맨은 그에게 괜찮다면 퇴근 후 우리 집에 들러 요리를 배워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또 다른 상상 속에서는 당신만 괜찮다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도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다. 진저맨은 아직 그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것인지 그저 연민이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진저맨은 생강을 채썰기 전에 남들이 꽤 괜찮다 말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에 직장을 떠날 것을 권고받았다. 그는 자신이 먼저 동료의 손을 잡았는지 동료가 먼저 자신의 손을 잡았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진저맨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그것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진저맨은 계산을 마친 대파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있었다. 그가 집으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대파 쪼가리가 흩뿌려졌다. 그렇다. 그에겐 직업병이 있었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그는 손에 들린 것을 조각내어 버렸다. 그는 생각을 그만두는 법을 잘 몰랐다. 그의 머릿속엔 생각의 강이 끊임없이 흘렀다. 마치 어디에도 담길 수 있는 물처럼 언제 어디에서도 새로운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가령 성별을 가늠하기 위해 법원에 서 있을 때조차 변호사의 넥타이를 보며 어느 나라의 국기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이름도 모르고 그 나라가 지구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어서 스스로를 마음 깊이 의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물과 닮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정말로 투명했다. 어떤 색이든 잠깐 닿아도 변해버리는 물과 같았다.

진저맨은 정말로 투명했다. 그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으며 그 덕에 지금 생강을 채 썰고 있다. 투명도야말로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실은 그가 아주 끈질긴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엔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단어가 아주 많기 때문이었다. 사실 자신은 존재하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진저맨은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차라리 완벽히 투명해져서 아무도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으면 했다. 그는 투명해지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럴수록 고민하는 스스로가 더 또렷이 느껴질 뿐이었다. 그저 남들처럼 튀지 않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진저맨은 여자도 남자도 아니다. 그는 그게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무엇이든 흘려보낼 수 있었으나 계곡물 한가운데 자리한 묵직한 바위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어떤 말들은 생강 써는 기계를 들여와 그의 노란 손을 무용하게 만드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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