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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기계의 시범 운행이 있던 날 우유씨는 진저맨에게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했다. 기계가 안정적으로 운행되면 다른 부서로 옮겨질 텐데 자네는 생강 써는 일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나? 진저맨은 집으로 가면서 우유씨의 말을 면밀히 쪼개 보았다. 생강 써는 일을 못한다면 이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자신이 정말로 생강 써는 일을 가장 좋아하는 것인지, 새 일자리를 구한다면 어떤 직종으로 가면 좋을지 따위를 생각했다. 그러다 누구나 어디든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피곤이 몰려왔다. 진저맨은 자신의 사랑스러운 짐 더미 속에서 잠들었다. 무언가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어서 그의 집은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일층의 집주인은 그를 내버려 두었다.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고가구와 낡은 서랍장 같은 것을 지고 들어올 때면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을 텐데, 하며 걱정했지만 진저맨을 불러 세워 이야기 나누진 않았다. 진저맨은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 소란을 피울 일도 없었고 친구나 가족을 데려와 파티를 열지도 않았기에 집주인은 그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다. 가끔 마주칠 때면 고개를 숙여 인사도 곧잘 했다. 그는 진저맨을 성실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딱 한번 진저맨이 집주인을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진저맨의 이삿날에는 비가 심하게 내렸다. 트럭이 마당 앞에 멈춰 섰고 집주인은 거실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트럭에서 내린 진저맨은 푸른색 민소매 원피스 차림으로 짐들을 마당으로 끌어내렸다. 진저맨은 위험한 날에만 아끼는 옷을 꺼내 입고 나갔다. 어둡거나 눈비가 많이 내리는 날, 돌풍이 부는 날 등 외출주의경보가 발령되는 날엔 거리에 사람이 적었다. 진저맨이 끌어내린 짐은 짐칸의 반도 되지 않았다. 집주인은 저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궁금해졌고 궁금증은 이내 긴장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집을 계약할 때는 분명 사내처럼 보였는데 원피스 차림의 그는 마른 여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얼마 뒤 편안한 트레이닝 복장의 진저맨이 일층 현관을 두드렸다. 집주인은 걸쇠를 걸고 빼꼼 자신의 모습을 내비쳤다.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바닥에 밀폐용기가 놓여 있었다. 이사 떡 맛있게 드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포스트잇에 삐뚤빼뚤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 뒤 진저맨이 2층에서 지내는 5년 동안 그와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우유씨는 마침 자신이 아는 사람이 사람을 구하고 있다며 진저맨에게 이직 의사를 물었다. 진저맨은 사실 귀찮았다. 생각하는 것에도 많은 힘이 들었다. 그는 너무 많은 힘을 생각하는 데 쓰느라 정작 중요한 일에 있어서는 어떻게든 되라지, 생각할 때가 많았다.
자네는 생각이 너무 많아.
우유씨가 편의점 도시락을 먹으며 말했다.
그것만큼 즐거운 게 없지 않나요?
그것만큼 제자리걸음인 것도 없지 않나.
우유씨와 제가 반씩만 섞이면 좋겠네요.
혹시라도 마음이 있으면 연락해 봐.
우유씨가 명함을 건넸다. 구구빵집. 뒷장엔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진저맨은 집에 돌아와 그것을 거울 앞에 꽂아 놓았다. 그리고 새로 들인 베개를 세탁기에 넣었다. 그것은 집으로 오는 길에 가져온 커다란 베개로 거의 새것 같아 보였다. 의류수거함이 가득 찼는지 누군가 바닥에 비닐 보따리를 한가득 놓고 간 모양이었다. 이제 진저맨이 할 일은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그는 집으로 들인 모든 물건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너무 많고 또 자주 부르지 않아서 이름을 잃은 물건도 있었다. 그리하여 물건들은 자주 새 이름을 갖거나 다른 물건과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진저맨은 두툼하고 푹신한 베개에 브레드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진저맨은 정작 빵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물기를 머금은 브레드는 이제 베란다에 누워 볕과 바람으로 잘 부풀고 있었다.
브레드와 함께 누운 뒤로 진저맨은 잠자는 일이 또 하나의 놀이처럼 느껴졌다. 간지럽고 달콤한 꿈을 꿀 때가 많았으며 그럼에도 개운한 아침을 맞이했다. 브레드는 그 어떤 베개와 비교할 수 없었다. 형식이나 기능상의 측면에서 월등하다고 할 수 없었다. 브레드는 밤과 아침을 생경하게 만드는 베개였다. 그 말은 매일 주어지는 하루를 더 또렷이 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진저맨은 브레드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브레드가 반죽하는 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더 좋은 삶을 살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생강을 썰지 않기로 다짐했다. 진저맨이란 이름도 이제 작별일지 몰랐다. 하지만 브레드를 데리고 온 것도 이름을 붙인 것도 생강을 썰지 않기로 다짐한 것도 진저맨의 뜻이었다. 그리고 그는 어디서든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가 진저맨이 된 것처럼 말이다. 진저맨은 그 이름에 정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