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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 Mar 20. 2022

갑자기 이렇게 선물을 보내주다니요.

그런데 아드님은 없습니다. 따님입니다.

화이트 데이인 줄도 몰랐다. 워낙 그런 기념일을 잘 챙기는 편이 아닌 데다, 직장도 옮기고 정신도 없고 경미한 우울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는 중이라 안중에도 없었다. 사실. 그날도 그렇고 그런 월요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얼른 퇴근 시간이 다 되어 집에 가고만 싶은. 두통이 밀려드는 한낮의 나른한 기운을 버티기 힘든 그런 월요일. 바쁘게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내 마음 한 번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는 그런 월요일 말이다.


역시나 그렇듯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한가득 쌓이는 메시지를 정리하던 중 유난히 깜빡거리던 카톡창, 그리고 그 속에 도착한 선물이 정신없는 일상에 봄바람이 불게 해 주었다. 참으로 고맙게도.


발신인은 작년에 담당했던 고객(?)이었다. 무려 2만 원도 훌쩍 넘어 보이는 고가의 초콜릿을 보내온 것이 아닌가. 화이트 데이라며, 아드님과 맛있게 드시라며. 언뜻 보아도 비싸 보이는 선물에 당황하면서 동시에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고 정정해주는 디테일까지 선사하며 당장에 다다다다다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런 건 받을 수 없다, 이런 것은 아주아주 부담이 된다, 그냥 마음만 받겠다, 난 사실 초콜릿을 싫어한다(이것은 90% 정도는 사실이다. 초콜릿보다는 사탕을!) 등으로 극구 거절했다. 그 고객(?)과 나의 사이엔 이런 '금전'적 거래가 오가면 안 되는 사이이기도 하거니와 받자니 고마우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앞섰기 때문이다. 해준 것도 없는데.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고마움을 넘어섰다고 하는 게 맞다.


그래도 받으세요, 제 마음이에요, 하는 것을 겨우겨우 말리고 말려서 이제 드디어 선물을 취소하나 싶었는데 웬걸. 애초에 보낸 초콜릿은 취소하고, 조금 값싼 초콜릿 쿠폰을 보내왔다. 이건 정말 값싼 거예요,라고 적힌 메시지가 마치 이건 꼭 받아주세요, 하는 것 같아서 한참을 'ㅋㅋㅋㅋ'라고 웃다가 결국, 거절 못하고 받아 버렸다. 고맙다, 잘 먹을게, 앞으로 잘 지내고, 잘 살고, 라며 으~른 스러운 말도 덧붙이며 마음을 표현하니 어느새 카톡창이 잠잠해졌다.


혹시 너무 비싸면 거부하려고 슬쩍 검색해보니 우리 고객님의 수준으로는 그렇게 부담되지 않을 것 같고 이 정도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도 될 것 같아 교환권을 꾹, 눌러 폰에 저장해 버렸다.


이 일을 시작한 처음엔 이렇게 소소하게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 많았었다. 나 역시 고객에게, 고객도 나에게 마음을 담아 표현한 적이 많았다. 돈이 오가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한 번 툭, 던지는 마음은 꽤나 큰 감동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꼭 물질적인 것을 받지 않더라도 자필로 쓴 편지, 아니면 길고 길게 적어 내려 간 마음을 담은 카톡, 메시지 등은 두고두고 보고 싶을 만큼 깊은 선물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그런 소통이 어려워지게 되자 마음의 문을 먼저 닫아버리게 됐다. 내가 100을 주었을 때 상대가 100은커녕 10도 주지 않는 것에 지쳐서 우리 고객들이 원래 그렇지, 라며 자조 섞인 이야기도 꽤 많이 했던 것도 사실이다. 작은 말에도 깊은 감동을 받는 나는 작은 실망에도 큰 상처를 받는 여린 심장을 가진 사람. 그 때문에 하루하루가 늘 너무나 뜨겁고, 너무나 아팠다. 그래서 늘 '일로 만난 사이'에는 너무나 깊은 '정'을 주지 말자고 다짐했었더랬다.


그런데 이렇게 훅, 마음에 감동을 주고 떠나버리니 10년 간 겨우겨우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다. 상처받기 싫어 꽁꽁 닫아둔 빗장이 스르르 열리는 것만 같다. 당연히 오래 볼 수 있는 사이라 생각해 툴툴 거리며 무심히 대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괜스레 미안한 마음까지 든다. 작년에 최선을 다한다고 했지만 어쩌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당장에라도 답례를 하고 싶지만 그 또한 웃긴 것 같아 한 템포 멈추고 대신 이렇게 글을 쓴다. 나의 고객은 이 글을 볼 가능성이 0.00000001%도 되지 않기에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적어 내려 가 보는 것이다. 초콜릿을 사실 좋아하지는 않지만 덕분에 풍요로운 마음으로 그날을 보냈다고. 진심을 다해 고맙다고.


그리고 생각해본다. 지금 이곳에서도 닫힌 마음으로 보나다가 훗날 아쉬움과 후회가 범벅되지 않게 나 스스로도 조금은 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몇 년 후 또 갑자기 이별을 맞이할 때에 조금이라도 덜 미안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의 말도 풀지 못했던 단단한 자물쇠를 풀어버린 초콜릿. 참으로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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