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원래는 이렇게 길어질 글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43편의 연작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처음 글을 적은 게 2020년 2월 3일이고 마무리한 게 3월 22일이니까 총 49일간 글에만 매달렸네요.
이 글을 적기까지 나아가 적는 과정을 이야기함으로써 후기를 채우고 싶습니다. 처음 글을 쓰게 된 건 별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평소 해오던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과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었거든요. 실제로 시중에 관계와 관련한 서적은 많지만, 정작 실용적으로 도움 될 만한 게 없음이 아쉬웠습니다. 뭐랄까요, 천편일률적인 서적이 많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던 일이 조아라에서 오래도록 제 글을 읽어주신 Hermity님의 요청과 응원이었습니다. 아마, Hermity님이 없었으면 이 글을 시작하지도 못했을 거예요.
처음 글을 시작하고 명제 둘까지는 어렵지 않게 완성했습니다. 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수준이었거든요. 하지만 명제 셋으로 넘어오자 갑작스레 어려워졌습니다. 하고 싶었던 모든 이야기를 전부 다 했다는 느낌이었어요. 한 동안 자기 자신을 압박해보고 괴롭혀도 봤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그냥 쉬었습니다. 총 50일의 집필 기간 중, 10일의 휴식이 명제 셋을 앞두고 있었으니 사실 명제 셋은 억지로 썼다고 봐야겠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한 건 삭발이었습니다. 머리를 다 밀어버린다는 게 우습기도 하지만, 글만 쓰고 생각을 깊이 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1mm로 머리를 다 밀어버리고 종일 인간관계에 관한 고민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아마 삭발하지 않았다면 명제 셋 이후로는 글을 더 적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며 가장 힘들었던 건 제 과거의 실패를 마주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글 뒤에서 저는 마치 다 안다는 양 으스대지만, 정작 이 글은 제 상처와 실수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저는 한때 사람을 많이 알고 지냈었고, 늘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결핍을 지닌 사람이었죠. 한때 그런 인기를 잠깐 누렸었고 지금은 다 상실했습니다. 도시국가인 베네치아가 상업적 풍요로움을 잃고 미술에서 탁월한 성취를 낸 것처럼, 저도 관계를 잃고서야 관계를 돌아보는 글을 쓴 셈입니다.
한때는 관계를 망치고야 마는 제 예민함과 불완전함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건 싫다 정도가 아니라 혐오하고 경멸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진저리 나는 일이었죠. 저는 신경질적이면서도 불안정한 인간입니다. 이 두 가지는 좋은 글과 사유를 하는 데 재료가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자신을 공격 하는 자가 면역적 질환처럼 작용합니다. 어쩌면 제 사고 시스템은 결함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늘 자기 공격의 위험을 내포하고 살아가니까요.
그러나 이번에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비록 인기 있는 글도 아니고 타인이 인정할만한 내용도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새로운 형식과 관점의 인간관계 서적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은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자답하자면 결국 이 책은 마이너스가 준 선물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비록 자신을 심하게 미워했고 글을 쓰는 내내 미숙했던 과거의 실수를 마주하는 게, 괴로웠으나 그런 실패가 있었기에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한 장 남짓한 이 후기에 꼭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은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그 불공평함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실패는 때로 좋은 글감이 될 수 있고 불행은 또한 성찰의 재료가 되고는 합니다. 인생을 안다고는 말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살아간다면, 이런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자랐음을 인정하고 나아간다면......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울퉁불퉁한 사면 또한 자원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사막과 고산 지대에도 식물과 동물이 서식합니다. 그 황량한 풍경이 정글이나 바다가 면한 산만큼 아름답지는 않지만, 분명 거기에도 미(美)가 존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