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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우 Mar 22. 2020

인간관계를 위한 빨간약(41)

[QnA 5부]

1. 헌신이 보답받을 때도 있잖아요?


실제로 헌신이 보답받는 일도 있습니다. 큰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집중과 희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고요. 다만 저는 앞선 내용에서 헌신을 ‘무리하는 것’으로 정의했고 관계에 해롭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헌신의 의미를 타인 또는 프로젝트를 위해 무리한다는 의미로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살다 보면 무리해야 할 때가 분명 있습니다. 가령, 시한은 촉박한데 반드시 성공시켜야 하는 프로젝트나 내 인생에 다시 오지는 않을 기회라면 억지로라도 해야죠. 하지만 이런 무리 이후에는 반드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몸과 마음의 부상이 대표적이죠. 자기에게 버거운 일을 하고 나면 꽤 오랜 시간의 휴식이 필요합니다. 만약, 이런 휴식을 건너뛰고 바로 새로운 일에 몰두한다면 심각한 우울감이나 탈력감에 시달려 자기 파괴적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된 말로는 뚜껑 열린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무리하고 나서 쉬지 않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틀 밤을 새웠다는 건 거의 사흘만큼의 에너지를 당겨 썼다는 의미니까요.


즉, 무리는 일종의 단기 대출입니다. 그것도 고액의 이자가 붙은 대출이죠. 이런 대출이 나의 사업과 성공을 위해 쓰였을 때는 실패해도 좋은 경험 했다는 마음으로 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사업이나 행복을 위해 투자됐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빚을 내서 투자했는데, 그게 실패로 이어지면 그때의 상처와 후유증은 굉장하죠. 


관계에서의 헌신은 대출을 낀 투자와 유사합니다. 가령,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단기적으로 헌신을 요구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게 시간이든 돈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가 무리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잠시 생각해 본 후, 우리는 서로의 행복을 위해서 희생해야겠다고 여겨 부탁을 들어줬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결과가 좋아 우리의 헌신은 모두의 행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피엔딩이라도 헌신했을 때 겪은 고통과 괴로움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그건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상대에게 서운함이 쌓였을 때 이런 말과 함께 폭발합니다.


“그때 나는 네가 했던 무리한 요구도 참고 들어줬어. 그런 내가 이 정도 배려도 못 바라?”


이건 그가 잘못돼서가 아니라 헌신하는 동안 무리해서 그런 겁니다. 그 시간을 견디는 게 괴로웠기에, 상대가 아무리 잘 달래주고 보상해주더라도 부정적인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타인에게 헌신하는 건 관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큽니다. 심지어 우리가 현신한 대상이 기대하는 만큼 보상을 안 해주면 어떨까요. 해피엔딩인데도 분쟁의 씨앗이 남는데, 이런 불충분한 해피엔딩일 때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헌신이라는 나 자신을 위해서만 해야 하고, 결과를 위해서 헌신해서도 안 됩니다. 특정 프로젝트에 헌신할 거면 해당 프로젝트 자체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얻을 보상이 아니라 참여하는 과정 자체가 곧 보상이 돼야 한다는 뜻입니다.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헌신을 요구할 때는 내가 헌신하는 그 자체가 행복이고 연인으로서 이상적인 행동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헌신했다고 여기지 않고 자기 충족감을 느낄 수 있거든요.


2. 강함이 비인간성으로 변질할 때.


인간으로서 조심해야 할 태도 중, 하나가 나와 세상을 동일시하는 겁니다. 자기 생각이 다수라고 해서 그걸 곧 세상의 상식이나 옳음으로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그게 곧 옳음일 수 없고 반대로 내가 소수의견이라고 해서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자아와 세상의 동일시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강함이 곧 비인간성으로 변질하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음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곧 자기보다 무능한 개인에 대한 몰이해가 발생합니다. 제가 가장 친구는 입사 초에 이런 말을 달고 살았습니다.


“장대리 개새끼!”


왜 그리 장 대리님을 미워하냐고 물어보면, 일 못 하면 사람 취급도 안 해서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기업에서 일을 못 하는 인재가 비판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일이 아니라 인신공격이나 가족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면 이건 다른 범주의 문제가 됩니다. 조직의 리더를 맡거나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분 중, 종종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경우가 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게으를 수 있느냐면서 놀라움과 동시에 경멸이 깔린 언어를 쓰고는 하거든요. 이런 강함은 비인간성을 내포한 강함이므로 결론적으로는 나약함입니다. 어째서 이게 나약함이 될까요? 그건 이런 강함이 인간관계에서 더 안 좋은 걸 만들어 낼 뿐 아니라 거의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해서입니다.


이전 다섯 개의 명제를 다루며 인간관계에 대해 고찰한 건 어떤 식의 자질과 태도, 가치가 관계에서 더 유리한지를 따져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리하다는 건 곧 더 많은 이익을 생산한다는 뜻입니다. 즉 흔들리지 않음이 타인에 관한 몰이해로 이어진다면 그건 강함이 아니라 비인간적인 태도입니다. 타인과 내가 다를 수 있음을 이해하기 이전에 내가 타인과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음이 곧 강함이 될 수 있고, 이런 긍정적 안전성이 관계에서의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므로 흔들리지 않는 내면을 지니게 되거든, 반드시 사람에 대한 여유를 보여줘야 합니다. 만약 여유를 못 보여주겠거든 차라리 무관심한 게 낫습니다. 말 그대로 타인이 어찌 살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므로 자기 인생만 잘 경영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누군가가 타인에 대한 평을 부탁한다면 내 일에만 집중하느라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리면 됩니다. 굳이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줄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나와 다른 삶과 태도에 대한 혐오나 멸시를 드러내지만 않으면 됩니다. 나의 우월함은 오직 나의 노력으로만 성립하는 게 아니라, 타인의 직‧간접적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 됩니다.


3. 따뜻한 쿨함과 차가운 쿨함의 경계.


분석 파트에서 수용성이 따뜻함과 차가움을 가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미진했던 설명을 좀 더 보충하고자 마지막 답변으로 이 내용을 골랐습니다. 따뜻한 쿨함을 언어로 바꾸는 다면 이럴 겁니다. 네가 있으면 좋지. 네가 있어도 괜찮지. 반면 차가운 쿨함을 언어로 바꾼다면 이리 출력되겠습니다. 네 도움은 필요 없지. 나 혼자 하는 게 더 잘될 거 같아.


사람도 염치라는 게 있어서 자기가 이바지하지 않은 성과에 보상을 받는 걸 부끄러워합니다. 설사 본인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비판하고요. 그래서 팀 과제를 진행한다면 아무리 못난 팀원이라도 자기가 할 일 하나 정도는 부과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좋은 성과를 냈을 때 다 같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리더든 아니든 인간관계에서는 늘 타인에 대한 여유와 감사를 표현하는 게 좋습니다. 굳이 조언을 받아들이거나 상대의 말을 경청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이야기를 웬 간섭이냐는 식으로 면박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해줘서 고맙다고 표현하고 좋은 결과를 얻으면 덕분에 더 잘할 수 있었다고 말해주는 겁니다. 이렇게만 해도 사람이 훨씬 쿨하면서도 따뜻해 보입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 모습을 보이면 상대는 나를 더 낮은 위계로 인식해서, 조언을 실천하지 않는 걸 고까워할 수 있거든요.


정리하자면 타인을 대할 때는, 늘 옆에 머물러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주면서 사소한 조언이나 간섭에 고맙다고 말해주는 게 좋습니다. 나아가 상대의 조언이 도움이 되었든 되지 않든, 성공했을 때 덕분이라고 말해주면 누구와도 잘 지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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